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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정미소 시대 마감은 새로운 시작

중앙선데이 2019.06.17 18:27
“안녕하세요, 연극배우 윤석화입니다.”  
‘연극배우’라는 자기 소개가 유난히 울림이 컸다. 객석에 불이 꺼지기도 전에 무대에 나타난 윤석화는 손에 대본을 들고 있었다. ‘2020년 런던 공연을 위한 오픈 리허설’이기에 완벽한 공연은 아닐 수 있다며 미리 양해를 구한다고 했고, 스태프에게 직접 사인을 보내 공연을 시작했다.

[유주현 기자의 컬처 FATAL]

2020년 런던 공연을 위한 오픈 리허설 형식
17년 운영하던 정미소 폐관작...12회 공연 전회 매진
45세 미혼모가 열두살 사춘기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6월 22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된다. [사진 돌꽃컴퍼니]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6월 22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된다. [사진 돌꽃컴퍼니]

 
통상 ‘오픈 리허설’이란 공연 개막 전 팬들에게 연습 과정을 보여주거나 취재진에게 미리 선보이기 위해 무료로 진행하는 행사다. 그런데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엄연한 유료다. 160석 소극장이긴 하지만 63세의 ‘연극배우’ 혼자서 하는 ‘오픈 리허설’에 유료 객석을 꽉 채우는 저력이라니. 중년 이후 여배우에게 설자리가 없다지만, 그는 늘 자기 자리를 만들어 온 것이다.  
 
이 무대가 각별한 이유는 따로 있다. 개인 신분으로 17년간 운영하던 대학로 실험극장 정미소의 폐관 공연인 것이다. 1983년 ‘신의 아그네스’ 돌풍으로 시작해 배우를 넘어 연출, 제작자, 극장주에 전문지 발행인까지, ‘공연계 여제(女帝)’라 할만 그의 이력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지금은 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까지 겸하고 있다. 화려한 이력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던 ‘연극인’ 인생. 극장을 폐관하면서도 “자연으로 돌아가 진짜 정미소나 차려야겠다”는 신소리를 하는 호방한 여인이지만, 내면은 어떨까. 폐관작으로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택한 것도 그에게 여한이 많이 남는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6월 22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된다. [사진 돌꽃컴퍼니]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6월 22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된다. [사진 돌꽃컴퍼니]

‘내년 런던공연을 앞둔 오픈 리허설’이라는 형식부터 의미심장하다. ‘딸에게…’는 영국의 유명극작가 아놀드 웨스커의 작품이지만 사실 영국에서는 공연된 적이 없다.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수식어를 붙인 제목처럼, 그녀를 위해 쓰여진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2년 산울림소극장에서 세계 초연을 올려 10개월간 전설의 흥행기록을 세운 그녀의 대표작이지만, 2013년 명동예술극장과 런던 공연을 동시 추진하던 중 탈세혐의로 구설에 올라 두 공연이 모두 취소되면서 개인적인 큰 상처를 남긴 영욕의 작품인 것이다.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6월 22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된다. [사진 돌꽃컴퍼니]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6월 22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된다. [사진 돌꽃컴퍼니]

 
단순히 ‘연극’이라고 부르기는 어딘지 모자라다. 90분 동안 50쪽짜리 대본을 쉼없이 읊어야 하고, 달콤한 자장가로 시작해 애교 넘치는 소녀와 폭풍 성량의 뮤지컬 가수를 오가는 열정적인 엔딩곡까지, 총 5곡의 영어 노래까지 소화해야 하는 노동집약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무대다. 
 
연극인으로서의 사명 하나로 운영하던 정미소의 폐관작으로 ‘딸에게…’를 택한 건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몇 년 전 인터뷰에서 40년 배우 인생에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 92년 ‘딸에게…’ 초연 당시 전석 기립박수를 받던 순간을 꼽기도 했었다. 
하긴 그녀는 늘 연극을 빌어 자기 이야기를 하곤 했다. 명동예술극장 공연 취소 이후 공백기를 가지다 연극에 대한 변치않는 사랑을 고백하며 돌아온 ‘먼 그대’도 그랬고, 40주년 기념 공연으로 올린 ‘마스터클래스’에서도 목소리와 사랑을 모두 잃은 오페라 여제 마리아 칼라스의 입을 빌어 삶과 예술에 관한 신념을 전했었다. 
 
45세 미혼모가 가슴에 멍울이 잡히기 시작한 12살 딸에게, 언제 읽게 될지도 모르는 편지 형식으로 ‘여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해 끝없이 혼잣말을 하는 형식이다. 45세라는 극중 나이와 63세라는 윤석화 자신의 실제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철없어 보이는 멜라니는 모순투성이 여인이다. 
 
사랑하는 딸에게 “말로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글로 쓰겠다”면서 “글이 말보다 어렵다”고 푸념부터 한다. “감정을 절제하라” “이성을 가능한 많이 활용하라”는 그럴듯한 충고를 하면서 혼자 극심한 감정기복을 보인다. 12년 만에 돌아오겠다는 옛사랑의 존재에 갈등하면서도 “사랑을 한번도 해본 적 없다”고 고백하고, 달콤한 자장가를 부르는가 싶더니 정작 딸에게 불러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모든 일엔 결과가 뒤따른다. 매사에 신중하라”고 점잖게 말하지만 실은 자신도 신중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6월 22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된다. [사진 돌꽃컴퍼니]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6월 22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된다. [사진 돌꽃컴퍼니]

남에게 도움되는 이야기를 해주기는커녕 자기 인생의 망가진 실뭉치를 풀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어린 딸에게 인생에 대한 교훈을 전하는 척, 중년여인의 불안한 심리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한 무대랄까. 45년을 살아보고도 여전히 살면서 중요한 그 무엇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고백이다. 아마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6월 22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된다. [사진 돌꽃컴퍼니]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6월 22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된다. [사진 돌꽃컴퍼니]

엔딩곡 ‘It was Our Time’은 젊음이 저물어가는 시점에 인생의 허무를 어렴풋이 깨닫고 조바심이 난 여인의 외침으로 들렸다. 초연 당시 35세 여인이었던 설정이 대본 수정을 거쳐 45세가 됐지만, 63세 윤석화의 실감나는 연기에 굳이 나이라는 설정이 무색해졌다. 55세에는, 아니 65세에는 우리가 인생을 알 수 있을까. 12살 딸에게 가르쳐 준대로 살 수 있을까. 
 
아마 윤석화 자신도 확신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정미소 시대, 아름다운 17년을 마감하는 그녀의 눈물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질 것임은 분명해 보였다. ‘No one can take from our time/ No one can shake the halcyon memories / When nothing was beyond our hopeful energies.(그 누구도 우리의 시간을 가져 갈 수 없어 그 누구도 우리의 아름다운 추억을 흔들 수 없어 우리의 활기찬 희망으로 못 할 것이 없었지)’ ‘It was Our Time’을 부르는 그녀의 열정이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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