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판 노예 실화를 환상적인 우화로 옮긴 '행복한 라짜로’

중앙일보 2019.06.17 17:31
영화 '행복한 라짜로'에서 1000대1의 경쟁을 뚫고 주연에 발탁된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사진 슈아픽처스]

영화 '행복한 라짜로'에서 1000대1의 경쟁을 뚫고 주연에 발탁된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사진 슈아픽처스]

외부와 단절된 외딴 시골마을에서 한 후작부인이 소작제도가 폐지됐다는 사실을 감춘 채 가난한 소작농들을 노예처럼 부린다. 아이들은 학교조차 가지 못하고, 부모들은 죽도록 일하고도 빚만 떠안는다. 1980년대 이탈리아에서 “대 사기극!”이란 신문기사로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던 실화다.  
 

지난해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실화에 영감, 종교적 상상 보태
감독 "현대에 성자가 찾아온다면
우리는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

이탈리아 현대판 노예 실화에 영감
20일 개봉하는 ‘행복한 라짜로’(감독 알리체 로르와커)는 이런 실제 사건에 상상을 보탠 영화. 주인공은 순박한 고아 청년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다. 후작부인에게 혹사당하는 것도 모자라 다른 소작농들에게 놀림 받으며 온갖 궂은일을 도맡던 그는 모두 떠나고 텅 빈 마을에 홀로 남겨진다. 수년 후 도시의 빈민이 된 소작농들 앞에 조금도 늙지 않은 라짜로가 나타난다.  
 
5년 전 전작 ‘더 원더스’로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던 서른여덟 살 감독 알리체 로르와커는 이 세 번째 장편으로 지난해 각본상을 차지했다.  
왼쪽부터 소작농들을 속여 착취하는 후작부인. 그의 반항적인 아들 탄크레디 역의 루카 치코바니는 유튜브 스타 출신 뮤지션으로,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사진 슈아픽처스]

왼쪽부터 소작농들을 속여 착취하는 후작부인. 그의 반항적인 아들 탄크레디 역의 루카 치코바니는 유튜브 스타 출신 뮤지션으로,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사진 슈아픽처스]

 
라짜로 토대는 성경 속 나사로 
영화는 독특한 시간여행기나, 씁쓸한 우화 같기도 하다. 라짜로는 성경에서 부활과 믿음을 상징하는 인물 나사로에서 따온 이름. 봉건시대의 착취를 간신히 벗어나고도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여전히 밑바닥 신세인 이웃들에게 그는 계시처럼 나타나 기꺼이 그들에게 이용당한다. 후작부인의 괴짜 아들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와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며 그를 끝까지 믿어주는 것도 라짜로뿐이다.  
 
CG(컴퓨터그래픽) 없이 빚어낸 ‘마술적 리얼리즘’의 순간들도 흥미롭다. 한 예가 “음악이 떠나는” 장면이다. 그저 음악이 듣고 싶었던 가난한 친구들을 문전박대한 성당에서 라짜로는 성당의 모든 음악을 보이지 않는 구름처럼 뭉쳐 자신과 친구들을 뒤쫓게 한다. 요즘 영화로는 드물게 디지털 아닌 슈퍼16미리 필름으로 촬영했다.  
도시에서 재회한 늙은 친구 탄크레디와 여전히 젊은 모습의 라짜로. [사진 슈아픽처스]

도시에서 재회한 늙은 친구 탄크레디와 여전히 젊은 모습의 라짜로. [사진 슈아픽처스]

 
1000대 1 경쟁 뚫은 선한 얼굴 
이런 장면에 설득력을 더하는 건 1000대 1의 경쟁을 뚫고 발탁된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의 선한 얼굴. 연기가 처음인 게 놀라울 만큼 그는 천연기념물급 순수 청년 라짜로 그 자체가 되어 영화 속에 살아 숨 쉰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연배우이자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아내 니콜레타 브라시가 후작부인 역으로 출연했다.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고전영화 ‘들고양이’(1963)에서 알랭 들롱이 분한 귀족에게서 ‘탄크레디’란 이름을 따오고, 하층계급 삶의 숭고함을 그리는 등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전통을 계승한 면모도 엿보인다.  
늙지 않은 라짜로와 옛 이웃 안토니아(알바 로르와처). 라짜로를 악마라며 피하는 다른 마을사람들과 달리 안토니아는 그를 경이롭게 여긴다. [사진 슈아픽처스]

늙지 않은 라짜로와 옛 이웃 안토니아(알바 로르와처). 라짜로를 악마라며 피하는 다른 마을사람들과 달리 안토니아는 그를 경이롭게 여긴다. [사진 슈아픽처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도 극찬  
“내가 좋아하는 많은 영화가 주던 어떤 영감을 이 영화에서 느꼈다.” 이탈리아계 이민 2세인 할리우드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이런 극찬과 함께 로르와커 감독에게 직접 연락, 이 영화의 전세계 배급을 돕는 총제작자 역할을 도맡기도 했다.  
  
연출의 변에서 로르와커 감독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행복한 라짜로들’을 만나곤 한다”면서 이렇게 글을 이었다. “그들은 어디에 있건 뒤로 물러나며 타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자리를 내준다. (중략) 오늘날 성자가 현대의 삶 속에 나타난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어쩌면 별생각 없이 그를 내칠 것이다.”
 
이탈리아 감독, '기생충'과 인연…
빈부 격차를 다룬 시선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과도 겹쳐진다. 실제 로르와커 감독은 올해 이 영화에 만장일치로 황금종려상을 안긴 칸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지난달 칸영화제 폐막식에서 심사위원장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수상자를 호명하는 모습. 뒷줄의 붉은 드레스 차림이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이다. [EPA=연합뉴스]

지난달 칸영화제 폐막식에서 심사위원장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수상자를 호명하는 모습. 뒷줄의 붉은 드레스 차림이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이다. [EPA=연합뉴스]

관련기사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공유하기
Innovation Lab
Branded Content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