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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틀렸고 나는 문제 없다', 일본 지식인의 모순

중앙일보 2019.06.15 11:00
Focus 인사이드 
 
지난 2017년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일본을 방문했던 당시 도쿄 신주쿠에 위치한 주일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 인근에서 우익단체 회원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지난 2017년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일본을 방문했던 당시 도쿄 신주쿠에 위치한 주일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 인근에서 우익단체 회원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히틀러, 1933년 '분서갱유' 사상 통제
日 지식인 '나치 독재 문제 있다' 규탄
'대동아공영권'과 침략전쟁은 옹호해
3년 뒤, 군사력 키워 독일과 손잡아

1933년 5월 10일 독일 전역에서 나치의 주도로 벌어진 서적 소각 사건은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이른바 나치가 추구하는 독일 정신을 위배하는 각종 저작이 화형이라는 상징적인 처벌을 받은 것인데, 특히 프로이트, 마르크스 등이 저술하거나 이들의 이야기나 사상이 담긴 도서들이 공격 대상이었다. 편협한 이론에 사로잡힌 나치의 이런 돌출 행동은 그야말로 야만의 극치였다.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 권력이 전면에 나서 문화를 말살하려 드는 행위는 그야말로 저열하고도 극악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일부이기도 귀중한 기록을 왜곡하거나 지워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1933년 5월 나치 주도로 베를린 도서관 광장에서 벌어진 대규모 서적 소각사건 [사진 wikipedia]

1933년 5월 나치 주도로 베를린 도서관 광장에서 벌어진 대규모 서적 소각사건 [사진 wikipedia]

 
비슷한 사례가 기원전 3세기 말에 진시황(秦始皇)이 실시한 분서갱유(焚書坑儒)다. 오로지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누구나 비판하는 행위를 나치는 스스럼없이 자행했다.
 
대공황의 혼란기를 틈타 득세하기 시작한 나치는 인종 차별과 호전성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처음에 사람들은 단지 정권 쟁취를 위한 쇼맨십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후에도 앞서 언급한 도서 소각 사건처럼 상식을 벗어난 행동들을 쉬지 않고 벌이자 사람들은  서서히 두려움을 느꼈다. 독일은 불과 20년 전에 거대한 전쟁(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역이어서 체감으로 느끼는 공포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히틀러(가운데)가 1940년 2월 24일 뮌헨의 명소인 맥주 양조장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1920년 히틀러는 이곳에서 2천여명의 지지자를 모아놓고 나치 창당을 선언했다. [사진 AP=연합뉴스]

히틀러(가운데)가 1940년 2월 24일 뮌헨의 명소인 맥주 양조장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1920년 히틀러는 이곳에서 2천여명의 지지자를 모아놓고 나치 창당을 선언했다. [사진 AP=연합뉴스]

   
국제 사회는 나치의 이런 행위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해 9월 독일 유대인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계 인종대회를 열었고, 이듬해 4월에는 뉴욕의 교회 단체가 주관한 모의재판에서 히틀러를 문명파괴자로 정의하고 단두대형에 처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당시 사료를 살펴보면 이미 히틀러와 나치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대상이라고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나치 규탄에 앞장 선 하세가와 뇨제칸. 그러나 정작 일본이 주장하는 대동아공영권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사진 wikipedia]

나치 규탄에 앞장 선 하세가와 뇨제칸. 그러나 정작 일본이 주장하는 대동아공영권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사진 wikipedia]

 
흥미로운 점은 당시 일본 문화계도 발끈했다는 사실이다. 사건이 벌어 진지 일주일만인 5월 16일, 후지모리 세이키치(藤森成吉), 하세가와 뇨제칸(長谷川如是閑)처럼 사회주의 이념이나 자유주의를 신봉하던 문단이나 언론계 인사들이 긴급 총회를 열어 ‘히틀러와 나치는 역사를 반동시키는 범죄를 저지른 문명파괴자이므로 강력히 규탄한다’고 결의했고, 이런 의견을 담은 문서를 독일 정부에 공식 제출했다.
 
물론 이런 의견이 일본의 공식 입장이 아니고 이들이 일본의 정책을 이끌 만한 위치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했던 문화계니까 이런 행동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노몬한 전투 당시 광활한 초원에서 완전군장 차림으로 행군하는 일본 관동군 병사. 박보균 기자

노몬한 전투 당시 광활한 초원에서 완전군장 차림으로 행군하는 일본 관동군 병사. 박보균 기자

 
모임을 주도한 후지모리는 관동대지진 50주년이던 1973년에 세워진 재일한국인 추모비의 비문을 썼을 만큼 의식이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들의 악행에 대해서는 관대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소각 사건이 있기 2달 전에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해군 군축조약을 파기했다. 노골적으로 침략 전쟁에 더욱 채찍을 가하던 중이었다. 이후 1936년에는 독일과 방공협정을 체결한 후, 한 배에 탄 공동운명체가 되어 세계를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 
 
지난해 8월 15일은 광복절이자 일본의 종전기념일이다. 이날 야스쿠니 신사에 옛일본군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공개적으로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행위가 흔할 정도로 과거사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일본인이 많다. [사진 연합뉴스]

지난해 8월 15일은 광복절이자 일본의 종전기념일이다. 이날 야스쿠니 신사에 옛일본군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공개적으로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행위가 흔할 정도로 과거사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일본인이 많다. [사진 연합뉴스]

 
그처럼 호전적인 일본에서 나치가 문명 세계에 위협이 되고 평화를 위협한다는 주장이 나왔다는 것은 한마디로 모순이라 할 수 있다.  
 
대표자 중 하나인 하세가와는 반파시즘을 주장했지만, 대동아공영권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만큼 많은 이들이 일본의 침략 행위에 둔감했다. 자신들의 치부는 외면한 대신 남의 악행만 눈에 들어왔던 것이었다. 
 
일본이 유일한 원폭 피해국이란 점만 부각하고 원폭으로 공격을 받게 된 이유를 외면하는 것처럼 과거사를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일본의 고질적인 행태를 고려한다면 당시의 행위가 어쩌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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