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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더디 가도 가운데가 낫다

중앙선데이 2019.06.15 00:21 640호 29면 지면보기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지난 번 이 자리에 “말을 하기 전에 세 가지 ‘사’를 버리고 한 가지 ‘사’만 취하라”고 썼었다. 버릴 사 셋은 진실이 아닌 걸 말하는 것(詐)과, 건전한 양식에서 벗어난 말을 하는 것(邪), 그리고 자기 걱정을 세상 걱정인 양 말하는 것(私)이었다. 취할 사 한 가지는 아무 때나 입을 열지 말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려(俟) 말해야 한다는 거였다. 
  

야당 대변인 거친 말로 뭘 얻나
김원봉 복권이 그리 급한 일인가
역지사지는 곧 인류 최선의 진리
좌우 살펴야 도랑에 안 빠진다

‘역사상 가장 훌륭한 캔터베리 대주교’로 꼽히는 윌리엄 템플(1881~1944)의 말을 내 나름대로 변용한 것이었다. 그는 좋은 말의 네 가지 조건으로 “진실이 담겨야 하고 양식을 갖춰야 하며 세상에 대한 걱정에서 나와야 하고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할 기회를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 다음 얘기가 더 중요하다. “말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처음 세 가지는 노력만 하면 누구든 할 수 있다.”
 
누구든 할 수 있는 거라 오히려 간과되기 쉬울 듯해 새삼 꺼낸 얘기였는데, 그게 쉽지 않았나 보다. 이후에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고 외려 악화되고만 있으니 말이다. 말이라기보다 욕에 가까운 언어들이 떼 지어 폭발하고, 그 위험 수위는 갈수록 올라가며 악취도 더욱 고약해졌다. 말이 거의 전부인 정치권과 그들을 첨병으로 내세운 좌우 양쪽 진영에서 말 아닌 말로 서로 물고 뜯는다.
 
제1야당 대변인의 입은 한마디로 지나치다. 대변인으로서 자격이 있는가 의심하게 만들 정도다. 그의 말들은 재삼 인용할 가치도 없는데, 궁금한 것은 과연 그가 그런 말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언가 하는 점이다. 당 대변인이란 당 대표나 당론을 충실히 공표하고 옹호함으로써 당에 대한 호의적 반응을 최대화하고 부정적 반응을 최소화하는 역할 아니었던가. 그러기 위해서 상대 당에 대한 논평을 할 때도 지극히 절제되고 품격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 아니었던가. 자당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결국 상대 당과의 대화와 합의라는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선데이 칼럼 6/15

선데이 칼럼 6/15

그런데 그토록 수준 이하의 자극적인 말로 상대를 공격하기만 하는 건 대화는커녕 판을 엎어버리겠다는 뜻 아니면 무얼까. 30%가 채 못 되는 만년설 같은 지지층만 꽁꽁 얼려두면 다른 눈은 다 녹아도 괜찮다는 건가, 아니면 ‘빤쓰 목사’라고 불리는 인물처럼 노이즈 마케팅으로 다음 총선에서 내 몫을 확실히 챙겨놓겠다는 건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자신의 말재주를 자랑하고 싶어서인가.
 
야당 대변인을 비난하고 있는 정부·여당 역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야당의 막말을 비난하고 있지만, 스스로 막말을 유발하는 측면이 없잖은 까닭이다. 대통령의 말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 공적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고 백 번 훈장을 줘도 잘못될 게 없을 터다. 하지만 그게 다른 일 다 제쳐두고 해야 할, 그토록 급한 일인가. 그게 현충일 추념사에서 꺼냈어야 할 만큼 위중한 일인가.
 
앞의 사 세 가지는 없다 쳐도 마지막 하나를 취한 게 잘못된 것이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걸 했기 때문에 더 나쁜 거다. 야당 대변인의 말처럼 생각 없이 튀어나온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숙고한 끝에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문장이어서 다른 의도를 의심받는 것이다. 야당 대변인이 막말로 까부르지 않고, 점잖게 조목조목 짚었더라면 청와대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다.
 
‘버릴 사 셋 취할 사 하나’가 어렵다면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다. 알다시피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거다. 성경에도 나오고, 주역에도 나오는 인류 최고, 최선의 진리가 바로 역지사지다. 칸트의 ‘정언 명령’과 홉스의 ‘제2 자연법’ 역시 다른 게 아니다. 좌우의 갈등과 대립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이 시기에 특히 필요한 말이 아닌가 싶다.
 
길의 양 옆은 도랑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급하게 달리면 도랑에 빠질 뿐이다. 왼쪽 도랑이건 오른쪽 도랑이건 다치는 건 마찬가지다. 양 옆을 다 살피면 치우치지 않는다. 도랑에 빠질 일도 없다. 좀 더디 가더라도 길 가운데로 안전하게 가는 게 낫다. 방법은 단 하나 역지사지다. 보수건 진보건 다 나라 잘되고 백성들 잘살게 하자는 건데 역지사지 못 할 게 뭐 있겠나 말이다.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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