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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전7패, 운수 사나운 날

중앙선데이 2019.06.15 00:20 640호 16면 지면보기
안충기의 삽질일기 
연두와 초록 사이에 오월이 있고, 초록과 진초록 사이에 유월이 있다. 비 한 번 더 내리면 초록은 진초록이 될 텐데, 여름은 진초록의 바다이다.

연두와 초록 사이에 오월이 있고, 초록과 진초록 사이에 유월이 있다. 비 한 번 더 내리면 초록은 진초록이 될 텐데, 여름은 진초록의 바다이다.

# 5시30분. 해 뜨자마자 차에 열쇠를 꽂았다. 주말이라도 이 시간이면 어디든 막히지 않는다. 밭에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한다. 집 나서 첫 번째 건널목에서 빨간불에 걸렸다. 다음 신호등에서 좌회전을 하려는데 노란불이 들어오고, 그 다음도 그랬다. 또, 또또, 또또또…. 3㎞를 지나며 8개 신호등을 지나며 7번을 섰다. 승률 12.5%다. 투수나 타자는 2군 직행, 감독은 돌팔매 맞거나 짐 쌀 성적이다.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밭에 들어서니 이건 또 뭐냐. 쪼글이청상추 세 포기가 험하게 뜯겨나갔다. 그린샐러드볼 두포기도 정수리가 훤했다. 이 자식들… 빨간신호등을 향했던 적개심이 한순간에 고라니에게 옮겨갔다. 요즈음의 채소 식감은 10점 만점에 12점이다. 며칠 전에 내린 단비 덕에 잎들은 살이 오를 대로 올랐다. 아삭아삭 씹으면 온몸이 찌르르하다.
 
벌 꽃등에

벌 꽃등에

밥만 먹고 못산다며 사람들은 복어랑 옻순을 찾고, 거위 간도 내먹고, 병원을 탈출해 라면과 알코올도 섭취한다. 이성이 아무리 냉철해도 간사한 혀가 유혹하면 한방에 훅 간다. 고라니라고 다를 바 없어 외식에 목숨 걸고 밤마다 산을 내려오겠지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대파밭 가장자리의 적축면상추는 아예 모가지가 잘리고 몸통만 덩그러니 남았다. 늘어선 열댓 포기가 통째로 그랬다. 고라니는 훑어먹더라도 생장점은 남겨두는데. 양배추도 벌레 먹은 잎은 놔두고 뚝뚝 꺾여나갔다.
 
땅에 붙어 겨우 버티던 옥수수 대공이 비 맞고 쑤욱 고개를 뺐다. 풀들도 덩달아 기세가 올라 밭은 점점 아수라장으로 변해간다.

땅에 붙어 겨우 버티던 옥수수 대공이 비 맞고 쑤욱 고개를 뺐다. 풀들도 덩달아 기세가 올라 밭은 점점 아수라장으로 변해간다.

뇌에서 앵 소리가 나며 추리 RPM이 급상승했다. 절단면을 보아 그린볼샐러드는 고라니 짓이 틀림없다. 나머지는 사람 손을 탔다. 그간 교차 학습을 해와 반평균 점수가 높아진 농사 동무들은 아닐 테다. 내 밭에는 많은 이들이 오간다. 농사 동무들이 친구들을 불러 반창회, 동창회를 하고 등산모임 뒤풀이도 한다. 친지들과 동네 친구와 회사 동료들도 와서 놀며 봉지를 채워간다. 그래도 오뉴월에는 채소가 차고 넘친다.
 
하지만 손님도 급수가 있다. 말없이 풀 뽑고 밭을 다듬어 놓고 가면 업어주고 싶다. 삽질 좀 해봤다고 뻥치며, 한창 자라는 채소를 발로 뭉개고 다니는 이는 경계대상 1호다. 웬 풀이 이렇게 많냐며 멀쩡한 고수를 뽑아 던지는 분 만나면 환장한다. 덜 자란 봄무를 뽑아 흔들면서, 열무가 실하다며 심 봤다고 외치는 자를 보면 미친다. 이번 참사가 누구 소행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어쩌면 서리꾼의 짓일지도.
 
뚜껑 열리려는 머리를 식히며 낫질을 하는데 저쪽에서 중년 부부가 온다. 조용하기에 돌아보니 이 양반들 뭔가를 열심히 뜯는다. 아 진짜 이건 또…. 불특정 손님들을 겨냥했던 화살이 급히 과녁을 바꿨다. “저, 저기요 거긴 제 밭인데요”하니 엉거주춤 선 부부가 겸연쩍게 웃으며 “어 어 죄송합니다. 비름 뜯고 있어요”한다. 이 정도면 괜찮다. 풀 한포기 볼 수 없는 다른 밭들과 달리 풀 반 채소반인 내 밭에는 쇠비름과 참비름이 널려있으니. “비름이면 맘껏 뜯어가세요”
 
시원한 그늘에서 뒹굴다가 손바닥 체온에 놀라 제집 속으로 쏙 들어갔던 달팽이. 잠시 뒤 목을 빼고 안테나를 내밀어 여기가 어디인지 좌표를 탐색하고 있다. 데리고 놀다가 풀밭으로 휙.

시원한 그늘에서 뒹굴다가 손바닥 체온에 놀라 제집 속으로 쏙 들어갔던 달팽이. 잠시 뒤 목을 빼고 안테나를 내밀어 여기가 어디인지 좌표를 탐색하고 있다. 데리고 놀다가 풀밭으로 휙.

다시 허리 숙여 일하는데 옆 밭에 아줌마 둘이 나타났다. 아욱이 탐스럽게 잘 컸다고 인사를 건네니, 챙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 긴 옷으로 완벽한 햇빛방어체계를 갖춰 얼굴을 식별할 수 없는 아줌마1이 대뜸 “아저씨. 우리한테 고마운 줄 알아요”한다. 으아아아~ 진짜 정말. 분노의 화살이 드디어 임자를 만나 시위를 떠나려는 찰나 “고라니가 우리 밭 채소를 뜯어먹어서 아저씨 밭 채소가 괜찮은 거예요”하며 깔깔깔깔 웃는다. 물론 농담이었다. 내 밭보다 산에 가까운 그 밭 덕에 화를 면했다는 건데, 저도 초봄부터 지금까지 당하고 있거든요.
 
어, 오이가 달렸네. 함께 일하던 친구가 풀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오이를 찾아냈다. 땅 가까이 달리는 첫 열매는 따내야 하는데 다른 일 하다가 잊고 그냥 왔다. 일주일 뒤에 가면 다 자랄 테다. 땅에 닿아 썩을 수도 있지만.

어, 오이가 달렸네. 함께 일하던 친구가 풀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오이를 찾아냈다. 땅 가까이 달리는 첫 열매는 따내야 하는데 다른 일 하다가 잊고 그냥 왔다. 일주일 뒤에 가면 다 자랄 테다. 땅에 닿아 썩을 수도 있지만.

이래저래 운수 사나운 날인데 가만 생각하니 그렇지 않다. 모종 상추는 이제 뽑아버릴 때가 됐다. 나 대신 목을 쳐줬으니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다. 잎 떨어진 양배추를 살피다가 벌레도 세 마리나 잡았다. 아줌마2는 꽃대 올리는 아욱순을 뚝뚝 꺾어주며 그래야 가지를 치며 오래간다고 가르쳐줬다.
 
일 마치고 차문을 여니 삐삐뿅뿅띠리링찌릉따릉 거리며 요상한 소리가 났다. 시동을 걸어도 여전했다. 라디오를 켜보니 잡음이 심하다. 땡볕 오래 쐬어 일사병에 걸렸을까. 강산이 두 번 변하도록 탔으니 언제 맛이 가도 이상하지 않지만 살짝 겁이 났다. 케 세라 세라 하며 달리다 보니 소리가 사라졌다. 집으로 가는 길은 뻥뻥 뚫려 신호등 승률이 8할까지 올라갔다. 원투스트레이트에 어퍼컷까지 맞고 휘청했으나 막판에 뒤집기 성공, 이만하면 운수 좋은 날 아닌가.
 
게다가 친구가 봉천동에서 사다준 3000원 짜리 냉장고바지 성능은 기대 이상이다.
 
그림·사진·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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