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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키에 검은 눈, 육감적 입술… 쇼팽이 사랑한 그녀

중앙일보 2019.06.14 12:00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28)
쇼팽. Eugene Delacroix 스케치, 1838, 루브르 박물관 소장. [출처 루브르 박물관]

쇼팽. Eugene Delacroix 스케치, 1838, 루브르 박물관 소장. [출처 루브르 박물관]

 
쇼팽은 파리생활에 익숙해졌다. 쇼팽은 저녁마다 살롱과 파티를 돌아다녔다. 화려한 저택에서 잘나가는 사람들과 함께 멋진 분위기, 좋은 음식을 즐겼고 음악으로 값을 치렀다. 파리의 귀부인과 예쁜 아가씨들은 그를 둘러싸고 갈채와 사랑을 보냈다. 그의 성취는 확고했다.
 
그러나 한 겹의 화려한 장막을 걷어내면 쇼팽의 마음속에는 허전함이 있었다. 그의 겉은 최첨단의 프랑스 파리풍이었으나 속은 유럽의 변두리 폴란드 바르샤바를 못 벗어났다. 그는 프랑스어로 대화하는 친구에게는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가 있는 곳은 외국이었고 그는 가족과 떨어진 혼자였다. 향수와 우수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울타리 속의 따뜻한 가정과 안식이 그리워질 때였다.
 
쇼팽은 천성적으로 잘 아는 친한 사람에게만 문을 열어 깊이 받아들이고 진솔한 마음을 주었다. 마음이 통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딱 맞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녀는 폴란드에서부터 알던 사람이었다. 부유한 귀족 출신의 미인이었고 피아노도 잘 다뤘다. 그녀는 마리아 보진스카(Maria Wodzinska, 1819~1896)였다.
 
마리아의 오빠들은 바르샤바에서 학교에 다닐 때 쇼팽의 집에서 하숙했다. 특히 큰 오빠 안토니(Antoni Wodzinski, 1812~1847)는 쇼팽과 같이 뛰어놀던 친구인 데다 집안끼리도 서로 잘 알고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원 시절 몇 차례 그들 가문의 시골 영지로 가서 지내다 오기도 했다.
 
1834년 중순, 쇼팽이 독일에서 힐러, 멘델스존과 라인강을 따라 음악 축제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 제네바에 거주하고 있던 마리아의 가족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녀의 가족은 러시아의 압제에 항거하는 1830년 11월의 ‘바르샤바 봉기’에 참가했다가 그 봉기가 진압된 후 제네바로 도피 이주를 한 상태였다. (본 시리즈 9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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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스바트에 있는 쇼팽 스파 하우스의 모습. 쇼팽과 그의 부모는 1835년 8월 15일부터 한 달을 칼스바트에서 보냈다. 그들이 묵었던 호텔이 있던 일대의 건물은 1900년대 후반에 철거되었다. 쇼팽과 상관없는듯한 사진 속의 호텔은 19세기 말에 지어졌다. 1895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Luber Ferenc 사진, 2017. [사진 Wikimedia Commons]

칼스바트에 있는 쇼팽 스파 하우스의 모습. 쇼팽과 그의 부모는 1835년 8월 15일부터 한 달을 칼스바트에서 보냈다. 그들이 묵었던 호텔이 있던 일대의 건물은 1900년대 후반에 철거되었다. 쇼팽과 상관없는듯한 사진 속의 호텔은 19세기 말에 지어졌다. 1895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Luber Ferenc 사진, 2017. [사진 Wikimedia Commons]

 
편지에는 제네바로의 초대와 함께 마리아가 작곡했다는 곡도 들어있었다. 쇼팽은 기억 속에 어린 철부지였던 마리아가 곡을 썼다는데 흥미를 느꼈다. 그는 그 곡의 주제로 살롱모임에서 즉흥연주를 했다. 마리아 가족과 쇼팽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쇼팽은 어린 시절 옛 추억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마리아를 직접 만나게 된 것은 쇼팽의 몸과 마음이 최저점에 있을 때였다. 우연히도 5년 만에 가족을 재회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그가 느끼는 가족의 정은 최고점에 있었다. 쇼팽 자신도, 그의 부모도 쇼팽 옆의 빈자리가 크게 보였을 때였다. 1835년 초에 감기가 유행했다. 쇼팽은 심하게 앓았고 피까지 토했다. 타지에서 병을 앓으며 집과 가족 생각을 했을 것이다.
 
4월과 5월에는 이탈리안 극장과 파리 음악원의 연주 홀에서 공연했다. 둘 다 교향악단과의 협연으로, 큰 공연이었다. 이탈리안 극장에서의 공연에는 리스트도 참여해서 특유의 과시적이고 열정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두 공연 모두 쇼팽의 연주에 대한 청중들의 호응은 약했다. 특히 이탈리안 극장에서의 연주는 리스트와 크게 비교되었다. 리스트의 연주에 비하면 시적이고 섬세한 쇼팽의 연주는 큰 연주회장에서 단조롭게 들렸다.
 
쇼팽은 실망했고 다시 한번 대중연주회 공포증이 살아났다. 그는 리스트에게 털어놓았다. “나는 연주회에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청중은 나를 겁먹게 합니다. 그들의 숨소리는 나를 숨 막히게 해요. 호기심 어린 그들의 눈은 나를 마비시키는 것 같고, 낯선 얼굴은 나를 얼어붙게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타고났어요. 청중을 들었다 놓았다 하죠.”
 
낙심한 쇼팽은 위축되었다. 건강도 나쁜데 기분도 가라앉았다. 자신감을 잃은 그는 그 후로 이듬해 봄까지 청중들 앞에 전혀 서지 않았다. 사교활동도 줄였다. 사실 파리 음악원 공연 이후, 그는 큰 연주홀에서 교향악단과 협연하는 진정한 대중 연주회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해 쇼팽은 부모의 편지를 받았다. 양친이 휴양지인 칼스바트(현재 체코의 Karlovy Vary)에서 여름을 보낼 거라는 것이었다. 그곳은 지리상으로 파리와 바르샤바의 중간쯤이었다.
 
마리아 보진스카. 폴란드 국립 쇼팽협회 소장. [출처 폴란드 국립 쇼팽협회]

마리아 보진스카. 폴란드 국립 쇼팽협회 소장. [출처 폴란드 국립 쇼팽협회]

 
은퇴한 아버지는 나이가 들었고 의사의 휴양 권고가 있었다. 쇼팽은 모든 일을 제쳐놓고 짐을 쌌다. 며칠을 달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대했고 쇼팽은 눈물을 쏟았다. 때가 때인지라 가족의 정은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느껴졌다. 한 달을 같이 보내고 부모는 바르샤바로 돌아갔다. 누구도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 될 거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가족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쇼팽은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가서 마리아의 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아마도 러시아의 ‘1833년 대사면(大赦免)’에 따라 스위스 피난 생활을 접고 폴란드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것 같다. 그들과 소식을 주고받고 있었던 쇼팽은 그들 가족이 폴란드로 돌아가는 도중 그때 그곳에 머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쇼팽은 마리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느덧 16살이 된 마리아는 숙녀가 되어있었다. 쇼팽은 지난날 시골 영지를 방문했을 때 다른 누구보다 쇼팽과 숨바꼭질하는 것을 좋아했던 어린아이를 떠올렸다. 이탈리아계의 피가 섞인 그녀가 큰 키에 몽상적이고 열정을 담은 검은 눈, 육감적인 입술, 검고 긴 머리카락 그리고 구릿빛 살결을 가진 여인이 되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서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옛정을 나누고 있던 상태였으므로 상호 교감은 즉각적이었다.
 
둘은 매일 피아노에 같이 앉아있거나 혹은 조용한 곳에서 속닥거렸다. 마리아의 삼촌은 둘만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기침하거나 눈길을 줘서 주의를 주었다. 아무리 봐도 둘은 심한 듯했다. 그는 마리아의 어머니 테레사 부인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부인은 아이들 장난이라며 가볍게 여겼다. 쇼팽은 마리아의 앨범에 그의 녹턴의 몇 마디를 적어 넣고 뒷면에는 ‘행복하다’라고 썼다.
 
안토니 보진스키. 마리아의 오빠로 그는 1835년 파리에 머물며 쇼팽과 자주 만났다. 그는 1836년부터 이듬해까지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 이때 쇼팽은 그와 폴란드에 있던 그의 가족 사이에서 소식을 중계했다. 폴란드 국립 쇼팽협회 소장. [출처 폴란드 국립 쇼팽협회]

안토니 보진스키. 마리아의 오빠로 그는 1835년 파리에 머물며 쇼팽과 자주 만났다. 그는 1836년부터 이듬해까지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 이때 쇼팽은 그와 폴란드에 있던 그의 가족 사이에서 소식을 중계했다. 폴란드 국립 쇼팽협회 소장. [출처 폴란드 국립 쇼팽협회]

 
일주일은 금방 갔다. 쇼팽이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 10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마차는 문밖에서 쇼팽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아가 쇼팽에게 장미꽃을 건넸고 쇼팽은 그녀를 위해 즉흥적으로 왈츠를 연주했다. 손을 흔드는 쇼팽을 태우고 마차는 떠났다. 마리아는 마차가 멀리 사라진 후 그가 있던 거실을 걸으며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마리아의 가족은 식사 테이블에서 쇼팽이 앉았던 자리를 한동안 비워두었다.
 
쇼팽은 돌아오는 길에 독일 라이프치히에 들러 슈만과 그 주위 사람들을 만나고 파리로 돌아왔다. 쇼팽은 파리에 홀로 있던 마리아의 오빠 안토니와 거의 매일 만나 가족처럼 지냈다. 그리고 마리아의 가족과도 직접 소식을 주고받았다. 마리아 가족과 쇼팽은 이듬해 다시 만나기로 약속도 했다.
 
오랜만에 부모와 정을 나눴고, 편안한 고향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 쇼팽은 행복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성공한 그에게 꼭 필요한 ‘마음이 맞는 여인’을 만났다. 바르샤바에 있는 쇼팽의 가족도 드레스덴에서 일어난 일을 알았다. 쇼팽의 부모는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사람을 만났기에 싫은 눈치가 아니었다. 누나도 동생의 사랑이 기뻤는지 편지에서 장난스럽게 언급했다. 쇼팽이 자신의 가정과 미래에 대한 꿈을 꾼 것은 당연했다.
 
쇼팽은 마리아를 떠날 때 연주했던 왈츠를 완성해서 그 악보를 마리아에게 보냈다. 이 곡은 ‘이별의 왈츠(L’adieu)’로 알려졌고 이 곡의 자필 원고에는 ‘마리아 양(孃)에게. 드레스덴, 1835년 9월’이라고 적혀있다. 두 사람의 조합은 주위 모든 사람의 눈에 적절하고 이상적인 것처럼 보였다. 다음 편에서는 쇼팽과 마리아의 약혼과 파혼, 그리고 그것이 쇼팽에게 준 충격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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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섭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필진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 한국인이 좋아하는 고전 음악가 쇼팽. 피아노 선율에 도시적 우수를 세련된 모습으로 담아낸 쇼팽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일생의 연인 상드와 다른 여러 주변 인물에 관련된 일화를 통해 낭만파시대의 여러 단면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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