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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의 인(人)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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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중앙일보 논설위원,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ILO 아니었으면 직업훈련도, 차별금지도 없었다

중앙일보 2019.06.12 05:00
1969년 10월 20일(현지시각) 노벨상위원회는 짤막한 발표문을 냈다. '1969년도 노벨평화상을 올해로 50주년을 맞는 UN(국제연합)의 전문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에 수여하기로 했다'였다.
 

ILO 100주년 (下) - 한국과 ILO

수상 사유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세계 각국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저개발국에 전문 기술을 활용한 원조를 하면서 평화에 기여했다는 점을.
 
열악한 근로조건 개선을 통한 전쟁 방지, 공산혁명 저지라는 ILO의 창립 정신과 노력이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ILO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10번째 단체가 됐다.
ILO, 근대화시기 직업훈련, 산업안전 등 지원
ILO의 원조 대열엔 한국도 있었다. 먹고살 돈을 주는 게 아니라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원조를 했다.
 
57~71년까지 근로자를 해외에서 훈련하는가 하면 직업훈련원 설립 등에 250만 달러를 지원했다. 훈련 사업을 담당할 전문가도 파견했다.
국제노동기구(ILO)의 지원으로 중앙직업훈련원이 설립됐다. ILO에서 전문가로 파견된 프로젝트 매니저와 중앙직업훈련원의 교육부서장이 건축이 거의 완공돼 가는 훈련원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중앙직업훈련원은 1968년 설립됐다. [사진=ILO]

국제노동기구(ILO)의 지원으로 중앙직업훈련원이 설립됐다. ILO에서 전문가로 파견된 프로젝트 매니저와 중앙직업훈련원의 교육부서장이 건축이 거의 완공돼 가는 훈련원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중앙직업훈련원은 1968년 설립됐다. [사진=ILO]

 
77년에는 82만 달러를 들여 국립노동과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산업안전 전문가를 파견했다. 이 연구소는 97년까지 산업안전보건에 관한 조사·연구와 교육훈련, 산업재해와 직업병 예방에 관한 기술지원을 담당했다.
 
연구소를 설립하기 위해 68년 7월 이승택 당시 노동청장이 ILO를 찾아 원조를 부탁했다. 당시 ILO로부터 약속받은 원조 금액은 67만 달러였으나 ILO는 설립 과정에 추가로 든 비용까지 부담해 82만 달러로 늘었다.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ILO와 유엔개발계획(UNDP)은 1962년부터 서울에 있는 한국생산성본부의 확장에 참여했다. ILO 전문가인 빅토르 프리엘(왼쪽)이 난방설비를 점검하고 있다. [사진=ILO]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ILO와 유엔개발계획(UNDP)은 1962년부터 서울에 있는 한국생산성본부의 확장에 참여했다. ILO 전문가인 빅토르 프리엘(왼쪽)이 난방설비를 점검하고 있다. [사진=ILO]

국내 노동법·제도는 ILO가 만든 역사
ILO가 한국에 끼친 영향은 이뿐이 아니다. ILO는 한국 노동법·제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 82년부터 ILO의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네덜란드에선 노사정 대타협인 바세나르협약을 체결하는 등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 세계가 노동개혁의 깃발을 들었을 때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존재감이 없었다. 독재의 그늘에 쌓여 세계 시장 흐름을 쫓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그러다 91년 남북한이 UN에 동시 가입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한국은 ILO의 152번째 회원국으로 그해 12월 9일 가입했다. 이때부터 고용노동법 제도가 제모습을 갖춰갔다. ILO의 협약을 비준하면서다.
노태우 정부 때부터 ILO 협약 비준 시작
노태우 정부에서 근로감독과 선원건강검진, 고용정책 등 3개 협약을 비준했다.
 
이후 김영삼 정부에서 직업지도와 직업훈련, 동일임금, 노동통계 등 4개 협약을, 김대중 정부에서 고용상 차별금지, 장애인 직업재활과 고용, 최저임금 결정, 일자리 알선과 같은 고용서비스, 근로자 대표 보호와 편의제공 같은 협약을 잇달아 비준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석면안전 등 6개 협약, 이명박 정부에서 방사선 노출 근로자 보호와 발암물질 금지 통제 등 4개, 박근혜 정부에서 선원보호협약을 비준했다. 이렇게 29개 ILO 협약을 비준했다. 비준된 협약은 국제법상 의무를 부여받는 다자간 조약의 성격상 국내법으로 그대로 적용됐다.
노동통계, 근로감독, 직업재활 등 ILO 덕에 구축
사실상 근로감독부터 직업재활과 직업훈련, 차별금지, 최저임금, 산업안전은 물론 노동통계를 작성하는 것까지 한국의 고용노동제도는 ILO 덕에 구축된 셈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8개 핵심 협약 중 4개 협약은 ILO 가입 당시에는 정부는 물론 노조조차 비준을 미루자는 의견을 냈다. 국내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ILO도 비준 압박을 했지만 강하지는 않았다. 양해하는 분위기도 느껴졌다. 분단국가의 현실 등이 감안됐다.
OECD 가입 조건으로 ILO 핵심 협약 비준 약속
이런 분위기는 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변했다. OECD 가입 당시 정부는 핵심 협약 비준을 약속했다.
 
OECD가 국제 노동기준을 들어 한국의 가입을 허용하지 않으려 하자 외무부 장관 명의로 "노사관계 기준을 국제 기준에 맞추겠다"는 서한까지 OECD에 보냈다. 그렇게 29번째 OECD 회원국 가입을 성사시켰다.
선례가 없는 굴욕적 모니터링 감수하며 OECD 가입
당시 한국은 노동 모니터링을 수용했다. 선례가 없는 치욕적인 일이었다. 2007년까지 무려 10년 넘게 OECD로부터 노동 모니터링을 받았다.
 
OECD 어디에도 노동문제와 관련한 의무규정이 없었지만, 당시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무역과 노동기준 연계' 논리에 시범케이스로 한국에 모니터링 족쇄가 채워졌다.
 
ILO의 미비준 4개 협약 비준에 대한 압박도 강해졌다, 한국 노조가 제기한 결사의 자유 침해 관련 진정은 상당 부분 수용됐다. 권고 형태로 정부에 압박이 가해졌다.
역대 모든 정부, 협약 비준 준비를 위해 노동개혁 추진했지만 좌절
우리 정부도 난처해졌다. 비준을 모른 체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협약을 비준할 수는 없었다.
 
국내 노동 관련 법과 제도가 70~8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협약을 이식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역대 모든 정부가 노동개혁을 추진한 이유다. 국내법을 개정해 협약을 수용하면서 한국 현실에 맞는 완충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선 시행 중인데 우리나라에만 없다거나, 선진국에는 없는데 우리나라만 유독 시행하는 제도를 정비해야 했다. 그러나 노동개혁은 번번이 좌절했다.
ILO 총회 장면 [ILO=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ILO 총회 장면 [ILO=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한국은 회원국 중 분담금 13위의 정이사국
ILO에서 한국은 정이사국이다. 96년 3년 임기의 정이사국으로 선출된 이후 2022년까지 이사국으로 재선출 됐다. 분담금도 적지 않게 낸다. ILO 회원국 중 13위(2018~2019년 기준)에 해당하는 분담금을 낸다. 2017년 한국이 낸 분담금은 771만 스위스프랑(약 92억원)으로 ILO 예산의 2.04%다. 1위는 미국으로 22%, 일본이 9.7%로 분담금 국가 2위에 명단을 올리고 있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이 기사 작성을 위해 ILO 발간 자료, 『세계노동운동사』(석탑), 『OECD의 한국 노동법 모니터링』(장신철 고용부 직업능력정책관), 외교부 주제네바 대표부 보고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 고용노동부와 한국경영자총협회의 ILO 관련 자료 등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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