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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에 흉될까 고졸인척 했어"···상록야학의 밤은 환하다

중앙일보 2019.06.12 05:00
상록야학은 1976년 3월 문을 열었다. 이곳을 거쳐 간 학생만 8000여명에 달한다. 재개발과 임대료 상승 때문에 5번의 이사 끝에 1년 전 현재의 상가 건물 지하에 자리를 잡았다. 고석현 기자

상록야학은 1976년 3월 문을 열었다. 이곳을 거쳐 간 학생만 8000여명에 달한다. 재개발과 임대료 상승 때문에 5번의 이사 끝에 1년 전 현재의 상가 건물 지하에 자리를 잡았다. 고석현 기자

“나 어렸을 땐 여자들은 공부 안 시켰어. 고향이 충남 서천인디 시골서 국민학교만 겨우 나왔지. 영어 알파벳도 몰라 인터넷 아이디도 손가락 자리를 외워 쳤어. 여기 와서 손자 같은 선생님한테 많이 배워서 좋아.” 
 
지난 3일 오후 10시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상록야학에서 만난 신숙자(79)씨는 이렇게 말하며 밝게 웃었다. 중학교 2학년 과정에 재학 중인 그는 지난달 중졸검정고시에 합격했다. 팔순 가까운 나이가 무색할 만큼 활기찬 신씨는 48년째 보험설계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검정고시 시험을 보기 전까지는 부끄러워서 형제들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다”며 “나중에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이 ‘뭐하려고 그 나이에 공부하냐’며 말렸는데 두 딸의 지지 덕분에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9월부터는 고졸검정고시를 준비할 예정이다.
 
상록야학 최고령 학생 신숙자(79)씨는 지난달 중졸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신씨는 "외우는 것보다 까먹는 것이 많아 공부하기 너무 어렵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고석현 기자

상록야학 최고령 학생 신숙자(79)씨는 지난달 중졸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신씨는 "외우는 것보다 까먹는 것이 많아 공부하기 너무 어렵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고석현 기자

서울 회기동 경희대 정문 근처의 3층 건물 지하 312.9㎡ 규모의 ‘상록야학’. 밤늦은 시간이지만 교실엔 불이 환했다. 짧은 복도 옆 다닥다닥 붙어있는 강의실 문틈으론 교사들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곳에선 80여 명의 학생이 공부 중이다. 황기연(61) 상록야학 교무부장에 따르면 “서울에서 가장 학생 수가 많은 야학”이다. 1976년 문 열어 현재까지 이곳을 거쳐 간 졸업생만 8000여명에 달한다. 
 
학생 대부분은 50~70대 여성들이다. 장모(63·여)씨는 “11살에 서울에 올라와 제과·비누·가발 등 안 해본 공장일이 없다. 당시 월급 7000원을 받아 고향에 보내고 나면 빠듯해 공부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며 “주변에도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속이고, 아들이 학교에서 가져온 가정환경조사표에도 혹여나 흉이 될까 싶어 ‘고졸’이라고 했던 게 몇십년 동안 마음에 걸렸는데 재작년에야 상록야학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고 눈물을 훔쳤다. 
 
다른 58세 여학생도 “어려운 형편 탓에 어릴 땐 제화공장에서 일하며 동생 공부와 친정 뒷바라지하고, 그 뒤엔 결혼해 아이 키우느라 때를 놓쳤는데 공부를 마치지 못한 게 마음 한편에 숙제처럼 남아있었다”고 말했다. 
 
수업은 평일 오후 7시 20분부터 3시간여간 진행된다. 중‧고교과정을 비롯해 한국사‧한문 등 8개의 열린 강좌 수업도 있다. 수업료와 입학금은 무료다. 23명의 교사 중 대학생은 2명, 나머지는 전·현직 교사와 공무원 등이다. 일주일 2시간씩 무급 재능 기부를 하고 있다. 황 교무부장도 대학 시절부터 은행원으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37년간 이곳에서 봉사해왔다.
 
대학생 교사인 강태주(25·남·서울시립대)씨는 “학교 선배의 소개로 1년 전부터 수업을 하고 있다”며 “중‧고생을 대상으로 학원 강사와 과외를 많이 했지만 이곳 어르신들 학업 열의가 더 높다. 가르치러 왔지만 배우는 게 더 많다”고 말했다. 황 교무부장은 “요즘 인강(인터넷 강의) 등 교육 수단은 많아졌지만, 이들에겐 익숙하지 않다”며 “어르신 대부분 40~50년 만에 학습을 다시 시작하려니 적응이 쉽지 않은데, 또래끼리 연대의식을 갖고 공부할 수 있어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상록야학 교사 2명은 신씨에겐 손자뻘 대학생이다. 왼쪽부터 과학교사 강태주(25·서울시립대)씨, 학생 신씨, 사회교사 한동희(23·한국외대)씨. 고석현 기자

상록야학 교사 2명은 신씨에겐 손자뻘 대학생이다. 왼쪽부터 과학교사 강태주(25·서울시립대)씨, 학생 신씨, 사회교사 한동희(23·한국외대)씨. 고석현 기자

야학은 정규학교에 다니지 못한 사람을 대상으로 밤에 수업하는 곳이다. 60년대엔 전쟁으로 배움의 때를 놓친 사람들이, 70~80년대에는 공부보단 밥벌이를 위해 공장에 다니던 '여공' 등이 어렵게 배움을 이어가던 곳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 단어조차 생소한 이름이 됐다. 의무 교육이 확대되며 대안 교육기관으로서 야학의 필요성이 줄어든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서울시교육청과 서울시 평생교육과 관계자는 “야학은 ‘비정규 교육단체’로 학교·학원과 달리 등록·인가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현황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윤효(40·여) 상록야학 교사부장은 “예전엔 ‘야학 커뮤니티’가 운영될 정도로 활발했지만, 지금은 문 닫은 곳이 많아 연락조차 쉽지 않다”고 말했다. 상록야학 등에 따르면 현재 서울 시내에 운영 중인 곳은 중랑구 태청야학 등 10여개 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상록야학의 운영비는 연 3000~4000만원 정도로 대부분 강의실 임대료와 공과금으로 사용하는데, 졸업생과 교장선생님의 기부로 충당한다. 
 
“낮엔 일하고 밤엔 여기서 공부하던 학생이 어엿한 사업가가 돼 찾아오면 참 뿌듯합니다. 이런 졸업생이 후원도 해줍니다. 공장을 다니며 여기서 고교 과정을 마친 김홍수씨는 간판회사 사장이 돼 지금 상록야학 간판을 무료로 만들어줬지요." 황 교무부장의 말이다.
 
상록야학 학생은 대부분 입소문, 전봇대·벽보 광고 등을 통해 온다. 황 교무부장은 “어릴 적 학업을 끝내지 못해 소녀 시절 ‘교복을 입지 못한 설움’을 가진 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 공부를 이어가려 하지만, 야학이 아직 운영 중인지 몰라 못 오는 경우가 많다”며 “지자체에서 이런 분들을 대신 모집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곳에서 공부한 어르신들이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자신감과 자존감을 많이 갖는다. 중·고교 과정 외에도 평생교육과 열린 강좌를 늘릴 계획"이라고 했다. 
 
고석현·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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