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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오타쿠, 팬덤, 그리고 부족주의

중앙일보 2019.06.12 00:16 종합 29면 지면보기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5년 전에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오타쿠가 주인공인 장편소설을 썼다. 최근에 이 소설을 주제로 문학평론가와 대담을 했는데, 행사를 준비하며 5년 사이에 오타쿠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이 엄청나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점점 퍼지는 ‘덕후’와 팬덤 문화
새로운 정체성과 공동체 만들까
시장논리 속에 파편화 부를 수도

5년 전만 해도 오타쿠라는 단어를 신문에 쓸 때에는 옆에 괄호를 붙이고 ‘한 분야에 깊이 빠진 마니아’ 같은, 딱 들어맞지 않는 설명을 적어야 했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오타쿠, 혹은 한국말로 현지화한 단어인 ‘덕후’라는 말에서 이상한 사람, 신기한 사람이라는 뉘앙스도 거의 사라졌다(대신 ‘혼모노’라는 새 유행어가 나왔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너 어느 아이돌 덕질해?”라고 묻는 게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됐다. 반복 관람, 싱어롱 관람, 굿즈 시장, 신상품이나 한정판 판매점 앞에서 몇 시간이고 길게 줄서기 같은 오타쿠 문화가 일반 대중에게 퍼졌다.
 
5년 전 소설에서 나는 한국에서 오타쿠 문화가 퍼지는 이유를 청년들에게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는 견고한 사회 구조와 엮었다. 일본의 오타쿠 문화를 그런 식으로 분석한 글들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한국 젊은 세대의 팍팍한 현실과 자신을 위한 소비가 주는 작은 위안도 연결했다.
 
지금 그 소설을 다시 쓴다면 정체성 위기라는 측면을 좀 더 파고들 것 같다. 우리는 모두 남과 다른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현대 사회는 거기에 여러 가지 낭만적인 신화까지 더해 주체적인 개인이 되라고 강요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일은 현대 사회에서 더 어렵다. 그 사이에서 남다른 취향은 그럴싸한 대답이 된다. 내가 어떤 장르, 어떤 뮤지션의 덕후라는 게 나를 설명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취향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좀 애매하다. 피부색, 세대, 성, 성적 지향 등에 비해 취향은 훨씬 유동적이고 기만이 끼어들기도 쉽다. 취향은 존중의 대상일까?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뭘까? 세상에는 좋은 취향도 나쁜 취향도 없으니 다 똑같이 대하고 비판하지 말라는 말인가? 또는 TV 같은 공론 공간에서 와인에 10분을 할애하면 막걸리에도 그만큼 시간을 배정해야 한다는 얘기인가?
 
같은 5년 사이에 부쩍 커졌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문화 현상이 팬덤이다. 오타쿠 문화와 팬덤 문화는 얼마간 겹쳐 있기도 하다. 남다른 취향을 지닌 이들이 그 취향을 매개로 뭉쳐 ‘남다른 우리’가 된다. 팬덤은 구성원에게 학교나 고향, 기업 못지않은 소속감과 정체성을 부여한다. 팬덤 문화도 정치와 사회 영역으로 퍼졌다. 아이돌 팬덤이 개발한 소통과 행동 방식을 정치인 팬덤이 활용한다. 이런 움직임은 몇몇 지점에서 최근의 ‘정체성 정치’와도 맞물린다.
 
팬덤은 우리 시대의 유의미한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이것도 애매하다. 밝은 면을 보려는 사람은 팬덤이 사회운동에 동참하거나 기부활동을 펼치는 모습을 강조하지만 음습한 구석도 그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많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책임을 부여받기에는 구성원의 가입과 탈퇴가 너무 자유롭다 보니 밖에서는 늘 무책임하게 힘만 휘두르는 모습으로 비친다.
 
그런데 이런 고민들이 부질없게 느껴질 정도로 지금 한국 사회에서 오타쿠와 팬덤이라는 현상은 시장 논리에 단단히 사로잡힌 것 같다. 디지털 음원 시대가 오고 음반 판매라는 수익 모델이 무너지면서 음악 산업은 ‘덕질과 팬덤 장사’에 기대게 됐다. 같은 현상이 공연업계, 출판계에서도 일어났고, 이제 문화산업을 넘어 소비재 시장 전체로, 더 나아가 정치 영역으로도 확산되는 듯하다.
 
이 분야의 플레이어들은 열광적인 덕후와 팬덤이 초반 입소문을 내주기를 애타게 바라며, 그러다 보니 그 팬들의 심기를 절대 거스르지 않으려 한다. 나는 여기서 오타쿠와 팬덤 문화가 성숙하게 한국 사회와 결합하는 길이 종종 막힌다고 느낀다. 팬덤을 의식한 회사가 소속 아티스트에게 연애금지 조항에 서명하게 하는 상황이 정상인가.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너무 나간 상상인지 모르겠지만, 가끔은 한국 사회가 좌우로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족으로 갈라지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정치인 팬덤 현상은 한국 사회를 발전시키고 있나. 미성숙한 ‘부족 문화’ 속에 건강한 회의주의는 사라지고 단순주의와 극단주의가 득세하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세계가 파편화하는 걸까.
 
여러 부족이 각자의 토템을 강요하는 세상이 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부족의 역사와 금기를 배우고 존중하는 것? 설마.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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