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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무엇을 위해 예술을 지원하는가

중앙선데이 2019.06.08 00:20 639호 30면 지면보기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최근 가장 인상적인 문화 프로젝트는 젊은 엄마들이 전문 음악가의 도움을 받아 ‘내 아이만을 위한 자장가’를 만드는 ‘엄마의 작은 노래’ 였다. 싱글맘 등 9명의 참가자가 가사를 쓰면 사회참여적음악가(SEM)네트워크 소속 작곡가들이 곡을 완성했다. 그 결과가 지난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2019 ‘세계문화예술교육주간’ 국제 심포지엄의 사전행사로 공개됐다. 이는 뉴욕 카네기홀의 ‘자장가 프로젝트’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클래식 공연장 카네기홀이 청소년 미혼모 시설과 협력해, 싱글맘과 음악가를 이어준 프로젝트다. 특히 라이컬즈 아일랜드 교도소의 여성 수감자들이 밖에 두고 온 아이들을 생각하며 지은 자장가는 청중의 심금을 울렸다. 예술과 대중이 모범적으로 만나, 시민의 일상 속에서 예술을 실천하는 ‘공공예술’의 좋은 예다.
 

시민의 예술적 삶을 위한 공적 지원
예술가의 직업 보장 수단일 수 없어

이와 동시에 서울시 산하 서울문화재단의 예술지원사업이 일대 분란에 휩싸였다. 신임 김종휘 원장 취임 이후 사업을 재정비하며 연극 등 180억원 규모의 예술지원사업 공모 결과 발표를 한차례 연기한 게 사달이 났다. 재단은 조직개편 등에 따른 업무폭주를 이유로 밝혔다. 그러나 지원 없이는 작품 제작은 물론이고 생계까지 걱정해야 하는 예술가들을 사지로 내몰고, 예정된 대관 신청이 취소돼 예술생태계가 무너진다는 반발이 거셌다. ‘기승전-시민과 함께’를 외치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공공성을 위해 예술성을 희생시킨다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시민문화사업을 중시하는 서울시가 전통적인 순수예술지원을 줄여가는 수순이라 본 것이다. 재단은 서둘러 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문화운동가 손이상은 “고급예술을 주로 지원하던 정책 방향이 생활문화 지원으로 급격히 바뀐 데서 오는 반발”이라고 평했다.
 
예술지원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다. 지난 정권을 무너뜨린 ‘블랙리스트’ 사태만 봐도 알 수 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권력이 돼 정치의 예술통제 수단이 되기도 한다. 굳이 무슨 리스트가 아니어도 지원에는 선별과 심사가 필요하니, 배제되는 쪽에서는 불만이 나온다. ‘블랙리스트 트라우마’도 크다. 장르, 지역, 학교, 성별 등 각종 안배가 기획의 우수성을 앞서는 일도 벌어진다. 지원을 전제로 한, 지원용 맞춤 기획도 등장한다. 최악은 자생력은 뒷전이고 오직 지원에 의존해 살아가는 소수 ‘지원 전문가’들이다.
 
예술지원은 문화행정의 중심이며 포기할 수 없는 가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왜, 무엇을 위해 예술지원을 하느냐란 원칙에 대한 끊임없는 환기다. 당대 예술의 역할과 존재방식에 대한 질문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그저 익숙한 장르 별로, 잡음을 최소화하는 ‘균등배분’이 최선일 수 없다.
 
서울문화재단에는 (개인)창작작업실·연습실 지원프로그램이 있다. 6개월 임차료를 최대 1000만원까지 지원한다. 월 임차료가 200만원이라면 6개월분 1200만원 중 최대 1000만원을 지원하는 식이다. 미술평론가 임근준은 “예술가가 무슨 특권층도 아니고, 서울시 예산으로 예술가 개인의 작업실 임차료를 내준다는 게 말이 되는가. 수혜자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과 거리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뒷말이 무성하다”고 비판했다. “서울문화재단은 예술가복지재단이 아니다. 창작지원에 초점을 맞추는 게 옳다”고도 덧붙였다.
 
비록 소수라 하더라도 예술지원이 예술가들을 지원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면, 그것은 예술의 자율성을 갉아먹는 독이자 예술에 대한 모독이다. 예술가를 ‘구제’의 대상쯤으로 여기게 하기 때문이다. 예술지원은 우리 문화예술의 질을 끌어올리고 시민이 그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지, 예술가의 직업 보장 수단이 아니다. 지원금은 제대로 쓰일 곳에, 잘 쓰여야 한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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