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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빛 도솔천, 거울처럼 세상을 비춰주더이다

중앙일보 2019.06.06 13:00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36)
선운사 도솔천. [중앙포토]

선운사 도솔천. [중앙포토]

 
선운사 도솔천
그립다 말 못 하고
떫기만 한 내 사랑을 닮은 도토리
툭 하고 하나둘 떨어지는 거 보이세요
푸르게 흐르던 실개천 검게 물들이니
먹빛 흐름일지언정 거울처럼
세상 검부러기마저 하나하나 비춰주더이다
 
먹빛 아래
혼돈과 질서의 경계 한가운데에
잠 깨우는 목어 소리 따라
짠 내 바람, 물길 거슬러 오른다는 풍천 장어
탐진치 얽힌 진흙서 노닐다가
깊고 먼 바다로 나가 제 꿈을 낳는다 하더이다
 
목 넘김이 먹먹한 바라나시처럼
바람이 일어 북극성으로 역류하는 물길
각자의 별에서 시간표 따라 움직여 왔어도
늦고 빠름 없이 만나
보이지 않는 길 낯설어도 또한 먹빛을 나누더이다
 
해설
선운사는 많은 문인에게 영감을 준 절이다. 겨울에는 동백이, 가을에는 꽃무릇이 붉게 핀 절경이 유명하다. 어쩌다 보니 겨울도 가을도 아닌 봄에 선운사를 방문하게 됐다. [사진 윤경재]

선운사는 많은 문인에게 영감을 준 절이다. 겨울에는 동백이, 가을에는 꽃무릇이 붉게 핀 절경이 유명하다. 어쩌다 보니 겨울도 가을도 아닌 봄에 선운사를 방문하게 됐다. [사진 윤경재]

 
부끄럽게도 그 유명한 고창 선운사에 얼마 전에야 다녀왔다. 누구나 여행하기 전에 장소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사전 정보를 찾아보고 떠난다. 나도 그랬다. 선운사 하면 먼저 동백꽃과 꽃무릇이 떠오른다. 또 풍천장어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서정주, 김용택 시인을 비롯해 여러 시인이 선운사에 관한 감흥을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나도 이런 작품을 읽으면서 꼭 한번 방문해보리라 생각하다가 어쩌다 보니 기회를 놓쳤다. 그것도 때는 하필 동백꽃이 거의 질 무렵이고 가을에 피는 꽃무릇은 철이 아니다. 신구대 식물원에서 본 기억을 떠올릴 뿐이었다.
 
내 나름의 핑계를 대본다.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쓴 쥘 베른도 실제로는 이집트 여행을 하지 않고 수에즈 운하의 선상에서 힐끔 본 기억만으로 마치 이집트를 여행한 것처럼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의 통찰력은 이집트 지리와 역사를 진실하게 그렸다고 평을 받는다. 굳이 자기 사진만 찍는 관광 여행처럼 사실적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일행과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도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선운사가 전혀 낯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누군가가 버선발로 날 맞이해줄 것만 같았다. 선운사 동구 밖 주막에는 아직도 육자배기를 읊는 처자가 있을 것 같고, 도솔천에 발을 담그면 목이 떨어진 채 서글피 우는 동백꽃의 사연이 절실하게 들릴 것 같았다.
 
선운사가 자리 잡은 고창은 풍천장어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곳곳에 장어 치어를 잡기 위한 그물이 보인다. 풍천장어는 민물에서 7~9년을 자란다. [사진 윤경재]

선운사가 자리 잡은 고창은 풍천장어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곳곳에 장어 치어를 잡기 위한 그물이 보인다. 풍천장어는 민물에서 7~9년을 자란다. [사진 윤경재]

 
막상 선운사 입구 삼거리에 도착해보니 풍천장어 음식점뿐이었다. 그것도 널찍하게 주차장을 마련하고 현대식으로 지은 건물들이다. 도저히 객줏집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저 마음속에만 담아두어야 할 요량이다. 풍천장어는 본디 민물에서 7~9년을 자란다. 그러다 암수 성어가 새끼를 낳으러 지구에서 가장 깊은 곳인 마리나 해구 바닷물로 나가 생의 마지막 여정을 마치는 회유성 물고기이다.
 
여기서 풍천(風川)이란 용어는 장소를 뜻하는 게 아니다. 실은 풍수지리 용어다. 우리나라 물길은 지리적으로 동쪽 등줄기에 자리한 태백산맥을 원류로 해서 강줄기가 흐른다. 즉 동출서류(東出西流)의 서쪽지방 강, 낙동강은 북출남류의 방향성을 갖는다. 그런데 강줄기가 묘하게 서출동류, 남출북류하는 특이한 곳이 있다. 그렇게 보통과 역행하는 물줄기를 풍수학에서 '풍천'이라 부른다. 역행하는 두 물줄기가 마주치고 어긋나면서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이겠다.
 
세계적으로 풍천의 대표는 바로 인도의 갠지스 강줄기로, 바라나시 지역을 흐르는 강이다. 갠지스 강은 히말라야 산맥이 원류다. 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 특이하게 바라나시 지역에서는 물줄기가 도도하게 북향한다. 그래서 흐름이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는 해석이 생겨났다.
 
그러다 보니 인도사람들은 죽어서 유골이 강에 뿌려지면 천상의 세계로 직행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바라나시 화장터 장면을 떠올리니 삶과 죽음에 대해 느껴지는 먹먹함이 연상되었다. 우리나라에도 풍수학적으로 풍천이라 부를 만한 곳이 있다. 고창 선운사 앞 물줄기이다. 도솔천의 흐름이 바로 서출동류이다. 보통과 역행하는 흐름이다. 또 서해로 들어가는 주진천(인천강)은 강가 강처럼 북향이다. 그러니 ‘바람물줄기’라는 풍천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가.
 
또 도솔천이란 이름은 본디 하늘(天)을 쓰는 불교 용어다. 부처께서 머물고 계시며, 미륵보살이 지상으로 내려오려고 준비하는 하늘이다. 살아서 덕업을 짓고 불심이 깊은 사람만 들어간다는 천국이다. 그러니 兜率川은 兜率天으로 이끄는 물줄기란 뜻이겠다.
 
선운사는 손꼽히는 단풍 사진 출사지다. 검은 먹빛인 도솔천이 거울 효과를 극대화해 화려한 단풍을 비춰주기 때문일 것이다. 도솔천은 단풍이 없더라도 모델을 세워 사진을 찍을 만큼 멋있었다. [사진 윤경재]

선운사는 손꼽히는 단풍 사진 출사지다. 검은 먹빛인 도솔천이 거울 효과를 극대화해 화려한 단풍을 비춰주기 때문일 것이다. 도솔천은 단풍이 없더라도 모델을 세워 사진을 찍을 만큼 멋있었다. [사진 윤경재]

 
마침 초파일이 얼마 남지 않아 연등이 가득한 선운사 경내를 참례하고 도솔천 물줄기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역시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도솔천이 검은 먹빛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동안 수많은 사진작가가 왜 가을 단풍 사진을 찍으러 선운사에 가는지 이유를 잘 몰랐는데 비로소 명쾌하게 이해가 됐다.
 
거울은 투명한 유리 한쪽 면에 은 이온을 발라 빛이 투과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물상과 빛이 반사하는 효과를 극대화한다. 먹빛 도솔천이 바로 거울 효과를 극대화해 생생한 반향 사진을 완성하는 포인트란 걸 이제야 깨달았다. 도솔천에 내려가 발도 담그고 모델을 세워 사진을 찍고 싶었다. 비록 스마트폰 사진이지만 선운사 입구 다리 밑의 반향이 역시 멋지다. 그런데 도솔천 물가를 거닐다 보니 좀 생뚱맞은 안내문이 보인다.
 

물이 검게 보이는 것은, 자생하고 있는 도토리와 상수리 등 참나무류와 떡갈나무 등의 열매와 낙엽류 등에 포함된 타닌성분이 바닥에 침착되어 미관상 수질이 오염된 것으로 보이는 것일 뿐, 도솔계곡을 흐르는 물은 절대로 오염된 것이 아닙니다. -선운산 도립공원-

 
굳이 어법도 어색하고 또 오염되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안내문을 써 붙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도 선운사와 도솔천 여행의 감흥을 시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미흡하나마 한 수 지어보았다.
 
윤경재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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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윤경재 윤경재 한의원 원장 필진

[윤경재의 나도 시인] 시를 시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쓰기를 어려워들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이든 아니든 시를 쓰면 모두 시인입니다. 누구나 그저 그런 일상을 살다가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 특별한 체험이라면 감정을 입혀 쓰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시인으로 등단한 한의사가 연재하는 시를 보며 시인이 되는 길을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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