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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량한 노부인이 명탐정? 의외의 캐릭터 미스 마플

중앙일보 2019.06.06 10:00
[더,오래] 이광현의 영어추리소설 문학관(6)
카리브 제도는 지정학적으로는 중앙아메리카에, 문화적으로는 라틴 아메리카에 속하는 지역으로 분류된다. 카리브 판 위에 넓게 자리 잡고 있으며 700개 이상의 섬과 암초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섬들이 서인도제도(The West Indies)라고 불리는 이유는 1492년 이곳에 상륙한 콜럼버스가 인도에 도착했다고 믿고 그러한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환상적인 휴양지로 유명하지만 한편으론 살인을 비롯한 각종 폭력사건이 빈발해 세계적 우범지역으로도 꼽히고 있다. 전 세계 살인사건의 40%가 중남미를 포함한 이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역내 41개 도시가 세계 50대 우범 도시에 포함된 형편이다. 중남미와 카리브 해 지역이 세계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9%에 불과한 데도 이처럼 살인사건이 잦다는 것은 충격적인 소식이다.
 
영국 ITV에서 방영한 카리브해의 미스터리(A Caribbean Mystery) 스틸컷.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는 교묘하게 한정된 용의자, 중의법을 솜씨 좋게 구사한 대화 등 크리스티 특유의 묘사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진 periodfilms.ru]

영국 ITV에서 방영한 카리브해의 미스터리(A Caribbean Mystery) 스틸컷.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는 교묘하게 한정된 용의자, 중의법을 솜씨 좋게 구사한 대화 등 크리스티 특유의 묘사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진 periodfilms.ru]

 
1964년에 발표된 아가사 크리스티의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는 교묘하게 한정된 용의자, 중의법을 솜씨 좋게 구사한 대화, 작은 오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큰 수수께끼, 절묘하게 숨겨둔 의외의 범인 등 크리스티 특유의 묘사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미스 마플(Miss Marple)은 ‘여행을 하다 만난 사람의 개인 정보는 그 사람이 말하기로 한 것밖에 알 수 없다’는 말을 한다. 크리스티 추리소설의 특징인 신원위장, 인물들의 독특한 성격과 배경, 한정된 용의자들 속 의외의 범인이라는 요소는 ‘여행지라는 특유의 시공간에서 형성되는 인간관계’와 멋지게 어울린다. 작품 속 줄거리로 들어가 보자.
 
류머티즘 치료를 위해 조카인 레이먼드의 권유로 서인도제도로 휴양을 온 미스 마플. 그의 기사 노릇을 하는 늙은 소령 팔그레이브의 모험담을 듣던 그는 이곳에서 보내는 일들이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점점 지루해하는 그를 의식한 듯 팔그레이브는 ‘두 사람의 미스터리한 죽음’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는데 소령은 우연한 죽음들이 살인이며 자신에게 그 용의자의 사진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미스 마플에게 보여주려는 순간, 무엇을 보았는지 그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이야기를 흐지부지 끝내버리고 황급히 사진을 지갑 속에 도로 집어넣어 버린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팔그레이브 소령은 시체로 발견되고 사람들은 그가 자연사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미스 마플은 어제 그의 태도를 보고 그의 죽음에 석연찮은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팔그레이브의 소지품 중 어제의 사진을 찾지만 그가 말한 사진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살인사건의 냄새를 맡은 미스 마플은 사건을 조사하려 하지만, 낯선 곳에서 그는 쓸데없이 살인사건에 껴들려는 노부인일 뿐 사건수사는 녹록지 않은 데…. 그리고 연이어 벌어지는 살인사건.
 
카리브해의 미스터리(원제: A Caribbean Mystery, 1964). 문고판 원서. 영국 폰타나 출판사 간행. 30년만에 다시 읽는 아가사, 그 감동은 퇴색되지 않았다. [사진 이광현]

카리브해의 미스터리(원제: A Caribbean Mystery, 1964). 문고판 원서. 영국 폰타나 출판사 간행. 30년만에 다시 읽는 아가사, 그 감동은 퇴색되지 않았다. [사진 이광현]

 
“팔그레이브 소령이 지갑에서 꺼내다 황급히 도로 집어넣어 버린 그 사진이 그가 죽은 후에 사라져 버렸어요(The snapshot that the Major Palgrave had brought out of his wallet and replaced so hurriedly was not there after he died).”
"그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죠?(You think he was bumped off, don’t you?)” “ 확실하다고 할 수 있죠(That is definite).”
 
“몰리 무슨 일이야?” “빅토리아가…. 숲속에서 누군가가 칼로 그녀를 찔렀어요(Somebody put a knife in her).”
“빅토리아가 무언가를 보았거나 알고 있어서 그걸 이용해 돈을 뜯어내려 했을 거예요(tried blackmail).”
팔그레이브 소령에 이어 두 번째 희생자가 된 빅토리아.
 
라피엘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깡마르고 메마른 피부에 덮인 앙상한 뼈만 드러낸 초라한 모습의 노인이다(his bones draped with festoons of dry skin). 곧 죽을 것 같이 보이지만(looking like a man on the point of death) 지난 8년간 한결같은 모습이라 새삼스러울 건 없다. 그의 인생의 주된 즐거움은 다른 사람이 얘기하는 것을 강경하게(robustly) 부인하는 것이다.
 
“라피엘과 같은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엄청 까다로운 일이죠(I suppose looking after someone like Mr. Rafiel must always be rather exacting).”
“우리가 얘기하는 그 여자가 현행 살인범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I really can’t bring myself to believe that that girl we’ve just been talking to is a red-handed murderess).”
 
옅은 분홍빛 스카프를 쓴 할머니 미스 마플과 남의 도움 없이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할아버지 라피엘의 대화를 들어보자.
"미스 마플, 당신은 복수의 여신이 되려는 거죠(So, you are Nemesis, are you?)"
"그런 셈이죠. 당신의 도움을 빌려서 말이에요(I hope to be- with your help)"
"당신과 내가 어떻게 살인을 막는다는 거요? 당신은 연약한 할망구고 나는 폐인이나 마찬가지잖소."
 
이 작품에서 연쇄살인의 미스터리를 멋지게 풀어헤치는 노인, 미스 마플은 여성 영웅 캐릭터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왼쪽에서 두번째 인물이 미스 마플이다. [사진 periodfilms.ru]

이 작품에서 연쇄살인의 미스터리를 멋지게 풀어헤치는 노인, 미스 마플은 여성 영웅 캐릭터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왼쪽에서 두번째 인물이 미스 마플이다. [사진 periodfilms.ru]

 
노인 콤비가 나누는 대화에 실소가 나올 법하지만. 이 작품에서 연쇄살인의 미스터리를 멋지게 풀어헤치는 노인, 미스 마플은 여성 영웅 캐릭터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키워드는 ‘결핍’이다. 뭔가 결핍된 자가 영웅으로서 활약한다는 설정이 일으키는 괴리감. 그 괴리감이 신선한 의외성 그리고 의외성과 표리관계에 있는 현실성을 낳는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역시 의외성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노쇠’라는 약점을 보충해주는 지혜와 의지, 이 강약의 대비가 미스 마플의 영웅성을 돋보이게 한다. 라피엘의 도움으로 미스터리를 교묘하게 파헤치는 이 작품은 노인 콤비의 대활약을 통해 대단원을 맺는다.
 
급속도로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노인 문제는 개개인의 차원을 뛰어넘어 국가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중대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안락하고 행복한 여생이 되어야 할 인생 후반기가 길어진 기대수명으로 오히려 고통의 연장기가 되어버린 것이 서글픈 현실이다. OECD 최악의 노인빈곤율, 빈약한 복지제도 등 사회적 구조에 기인한 불편요소들은 기댈 곳 없는 노인들이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시공간까지도 허용치 않는다.
 
연약함, 결핍이라는 약점이 사회의 부조리를 파헤치는 적극적 사회참여의 장점으로 멋있게 탈바꿈하는 미스 마플의 영웅적 캐릭터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의 떳떳한 연령계층으로 안착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실버 인생’에 보탬이 되는 건강한 대한민국을 꿈꾸어 본다.
 
이광현 아름다운인생학교 강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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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현 이광현 아름다운 인생학교 강사 필진

[이광현의 영어추리소설 문학관] 영어 추리소설을 즐겨읽는 아름다운 인생학교 강사. 우리 모두는 '페르소나'를 쓴 이중적 인격의 소유자이다. 현대 사회가 설정한 패러다임에서는 누구나 가식적 가면을 하나씩 지닌 채로 본연의 나를 감추고 살아간다. 등장인물의 인간관계라는 드라마속에서 빈틈없는 논리 전개와 극적인 반전을 구사하여 페르소나를 벗겨내고 '인간의 민낯'을 들춰내는 대표적 추리 소설 작품을 통해 인간 본래의 모습이 복원되는 사회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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