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힘들었지만 좋았어" 운동회가 남긴 추억은 소중하다

중앙일보 2019.06.06 07:00
[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23)
운동회는 동네 축제 마당이다. 제주도 월랑초등학교에서 입학 전 아이들과 부모가 참가하는 종목이 열렸다. 이외에도 동네 어르신 달리기 등의 프로그램으로 운동회를 동네 축제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사진 양은심]

운동회는 동네 축제 마당이다. 제주도 월랑초등학교에서 입학 전 아이들과 부모가 참가하는 종목이 열렸다. 이외에도 동네 어르신 달리기 등의 프로그램으로 운동회를 동네 축제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사진 양은심]

 
“청팀 이겨라! 백팀 이겨라!” 운동회를 회상할 때마다 떠오르는 함성이다. 홍색과 백색을 선호하는 일본 사람들은 하얀 팀(白組) 빨간 팀(紅組)으로 나눈다. 연말의 NHK 가요방송 이름도 '홍백 노래대항전(紅白歌合戦, 고하쿠우타갓센)'이다. 입학식 등 축하할 일이 있을 때는 학교에서도 홍백만두(紅白饅頭, 고하구만쥬)를 만든다. 한국에서 청팀 백팀으로 나누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운동회 때에 팀을 나누는 것만 봐도 닮으면서 다른 게 한국과 일본인 듯하다.
 
2019년 5월 25일 토요일은 조카들이 다니는 제주도 월랑초등학교의 운동회날이었다. 마침 아버지의 제사로 친정에 가 있었던 나는 공항으로 가기 전 잠깐 참석했다. 팀 구성은 청팀 백팀이 아닌 '동반월', '서반월'이었다. 옛날에는 동서로 동네가 나뉘었고 청년끼리 싸움도 종종 있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월랑초등학교 동반월팀의 응원 도구. 청팀 백팀이 아닌 '동반월'이라는 문구가 낮설면서도 정겹다. [사진 양은심]

월랑초등학교 동반월팀의 응원 도구. 청팀 백팀이 아닌 '동반월'이라는 문구가 낮설면서도 정겹다. [사진 양은심]

 
이 학교는 운동회를 동네 축제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놀라운 점은 축제 분위기를 내기 위함인지 이벤트 회사의 사회자가 운동회를 진행한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가 추억을 말씀하신다. 병을 앓았던 아버지가 그 해를 넘기지 못할까 봐 사진사를 데리고 다니며 딸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고.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사진을 찍고 동영상까지 찍을 수 있지만,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1970년대만 해도 집에 카메라가 있는 집은 드물었다. 더군다나 가난한 농가라면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카메라가 있는 집 아버지는 동네 아이들 사진을 찍어 주느라 바쁘게 돌아다녀야 했다. 30여 년 전에 저세상 사람이 된 아버지는 절실하게 딸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 했다지만, 나에게 그 당시의 기억은 없다. 어머니는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다. 왜일까.
 
운동회는 아이들을 위한 것인가 부모를 위한 것인가. 부모는 예나 지금이나, 자식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려 애쓴다. 하지만 부모가 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식들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지 싶다. 부모의 사랑과 정성은 영양제처럼 아이를 키우고 난 후 그 대부분이 아이들 기억에서 사라진다. 부모가 상세하게 기억하는 일까지도 잊으니 말이다.
 
교직원 대 아버지 대항 이어달리기에서 스모선수로 변장해서 참가한 아버지 선수. 매해 다른 변장으로 운동회 분위기를 띄워준다. [사진 양은심]

교직원 대 아버지 대항 이어달리기에서 스모선수로 변장해서 참가한 아버지 선수. 매해 다른 변장으로 운동회 분위기를 띄워준다. [사진 양은심]

 
요즘은 급식을 제공하는 학교가 늘어나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맞벌이 시대라 어쩔 수 없는 흐름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아예 운동회를 평일에 하는 학교도 있다고 한다. 급식이 나오는 운동회, 평일에 부모 없이 치르는 운동회는 순간은 편할지 몰라도 지나고 나면 섭섭하지 않을까.
 
'부모가 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억을 만들 기회일 터인데 말이다. 운동장까지 음식을 배달시키거나 인근 식당에서 먹는 가족도 많다고 한다. 학교에 배달음식이라니, 이 또한 한국이어서 가능한 일이지 싶다. 나는 아이들 소풍이나 운동회 때마다 한국의 김밥을 말았다. 넉넉하게 만들어 친구들에게 맛보라고 나누어 주기도 했다.
 
운동회날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지나고 보니 참 좋은 날들이었다. 정신없이 뒷바라지할 때는 급식을 준다는 학교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조금 불편한 일들이 나중에는 추억이 된다는 것을. 나는 내 운동회 기억은 없지만 내 아이들의 운동회는 생생하게 떠오른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운동회는 아이보다도 그 부모와 가족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란부시 종목 준비 중. 긴장되는 순간. 북소리를 시작으로 춤사위가 시작된다. 학생들이 입고 있는 하삐(法被)라 불리는 의상은 학부모들이 기증한 것이다. 일본의 학교는 대부분 만국기를 달지만, 이곳처럼 잉어 깃발을 다는 곳도 있다. 잉어 깃발은 단오절이 있는 5월 한 달 동안 장식하고 운동회날을 마지막으로 철수한다. [사진 양은심]

소란부시 종목 준비 중. 긴장되는 순간. 북소리를 시작으로 춤사위가 시작된다. 학생들이 입고 있는 하삐(法被)라 불리는 의상은 학부모들이 기증한 것이다. 일본의 학교는 대부분 만국기를 달지만, 이곳처럼 잉어 깃발을 다는 곳도 있다. 잉어 깃발은 단오절이 있는 5월 한 달 동안 장식하고 운동회날을 마지막으로 철수한다. [사진 양은심]

 
2019년 6월 1일은 우리 아이들이 다닌 초등학교의 운동회날이었다. 우연히도 한국과 일본의 운동회를 일주일 사이에 보게 되었다. 제주도의 월랑초등학교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펄럭였고, 도쿄의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만국기 대신 커다란 '잉어 깃발(鯉のぼり, 고이노보리)'이 헤엄치고 있었다.
 
만국기 대신 잉어 깃발을 다는 것은 아들이 다닌 초등학교의 특색이다. 일본에도 만국기를 다는 학교가 대부분이다. '잉어 깃발'은 에도(江戸)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단오절에 남자아이의 출세와 건강을 기원하는 풍습이다. 단오절이 있는 5월 한 달 동안 교정을 장식하고 운동회 날 철수된다.
 
운동회의 구성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비슷하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종목은 '교직원과 아버지들의 이어달리기'이다. 운동 부족으로 몸이 굳어있는 누군가가 화려하게 굴러 넘어지며 관객들을 즐겁게 한다. 변장하고 뛰는 아버지도 꼭 있다. 아빠들의 무용담이 매해 늘어간다.
 
 
또 하나는 4·5·6학년 합동연기 '소란부시(ソーラン節)'이다. 일본의 전통적인 멜로디가 운동장을 채운다. "도코이쇼! 도코이쇼!" "소란! 소란!" 연기를 마친 6학년과 교사는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아이들이 감동한다면 역시 아이들을 위한 운동회일 것이다. 아이들도 부모도 교사도 추억을 쌓고 경험을 쌓고 성장해 나간다.
 
큰아들에게 물었다. "소란부시 어땠어?" "더운 날은 너무 힘들었지만 좋았어" 저학년 운동회 때 울었던 아들을 기억하는 나는 아들의 추억담에 그 눈물을 털어낸다. 같은 운동회라 해도 아이와 부모가 품는 추억은 다르지 싶다. 그리고 다 소중하다.
 
양은심 한일자막번역가·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먼지알지 런칭 이벤트
공유하기
양은심 양은심 한일자막번역가·작가 필진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 일본인과 결혼해 도쿄에 살림을 꾸린지 약 25년. 일본으로의 이주는 성공적이라고 자부한다. 한일자막 번역가이자 작가이며, 한 가정의 엄마이자 아내다. ‘한일 양국의 풀뿌리 외교관’이라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한국보다도 더 비빌 언덕이 없는 일본에서 그 사회에 젖어 들고, 내 터전으로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연재한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과 같은 이야기가 독자의 삶에 힌트가 되기를 바란다.

광고 닫기

미세먼지 심한 날엔? 먼지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