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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의 공존의 문명] 키루스 대왕의 지혜가 필요한 때

중앙일보 2019.06.06 00:32 종합 23면 지면보기
이희수 한양대 특훈교수·중동학

이희수 한양대 특훈교수·중동학

지금 걸프해역에서는 석유 수출을 원천차단하려는 미국과 이에 맞서는 이란 사이에 일촉즉발의 군사적 긴장상태가 고조되고 있다. 이란 핵시설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도 심상치 않다. 무엇보다 이란과 거래하고 있는 2000개 이상의 우리 기업의 피해가 걱정이다. 전면전 가능성은 낫지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기 국면은 장기화할 전망이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창건자인 키루스(기원전 559~530) 대왕의 지혜와 포용 정신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지는 순간이다.
 

2천년 전 노예 해방 명시한
세계 첫 인권선언문 공표
키루스대왕의 통치철학은
종교적 관용·종족적 융합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나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다름 아닌 키루스 대왕이었다. 세 대륙에 걸쳐 28개의 군소국가들을 거느린 진정한 의미의 세계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한 키루스의 통치 기본은 종교적 관용과 종족적 융합이었다. 피정복 민족들을 페르시아인들보다 더 우대하였으며 엘람어, 바빌론어,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여 모든 공문서를 세 언어로 작성하게 했다. 제국 내 소통의 원활함을 위해 수백명의 전문 통역사를 체계적으로 양성하였다. 승자의 언어와 종교를 타민족에게 강요하지 않았던 키루스의 통치는 당시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리더십이었다.  
 
그런 자유 정신은 결국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 공표로 이어졌다. 흔히 ‘키루스의 원통’이라 불리는 인권선언문에는 놀랍게도 노예제도 폐지와 노동자의 임금 지급, 여성인권의 신장 같은 혁명적인 조항이 들어있다. 원본은 대영박물관에, 그 사본은 유엔본부에 걸려있다.
 
세계 최초의 성문 인권선언문으로 불리는 ‘키루스 원통’. BC 6세기 키루스 대왕 시절 만들어졌다. 원본이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에 있다. [중앙포토]

세계 최초의 성문 인권선언문으로 불리는 ‘키루스 원통’. BC 6세기 키루스 대왕 시절 만들어졌다. 원본이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에 있다. [중앙포토]

키루스 특유의 관용 통치는 바빌론 유수에서 최고의 빛을 발했다.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에게 포로로 잡혀 혹독한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유대인을 해방해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밀린 월급을 지불하고 귀환 길의 안전을 확보해 주었으며 신성한 예루살렘 성전을 짓도록 허락했다. 그리스 역사학자 크세노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복속민들에게도 ‘Father(아버지)’였고 ‘빼앗는 자가 아닌 베푸는 자’로 칭송받고 기억되었다. 영국 역사학자 찰스 프리만조차도 키루스는 업적과 인품 모든 면에서 알렉산드로스를 훨씬 능가하는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구약성경 에즈라(공동번역 1:1~4)에는 키루스가 ‘고레스’로 나오는데, 바빌론 유수로 바빌로니아에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유대성전을 세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구약성경 이사야(45:1~4)의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라는 구절 등을 통해서도 키루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준 관용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키루스의 통치와 인재양성을 통한 제국 번영의 핵심은 크세노폰에 의해 저술된 『키루스의 교육』에 잘 나타나 있는데, 세계 정복자 알렉산드로스는 물론 르네상스 시대 마키아벨리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키루스는 동쪽의 마사게타이족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기원전 530년 8월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시라즈 근교의 파사르가다에로 옮겨져 6층의 기단 위에 투박하지만 장중한 석관 속에 안치되었다. 무덤 형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엘람 시대의 지구라트를 닮았다. 세부 건축 장식과 디자인은 엘람, 바빌론, 아시리아, 고대 이집트, 아나톨리아 형식을 다양하게 결합하여 다문화 융합이라는 그의 통치 철학이 무덤양식에도 그대로 표현되었다.
 
파사르가다에 일대는 ‘파라다시어스’로도 불렸다. 오늘날 천국의 정원이란 의미의 파라다이스란 말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장미와 재스민이 만발한 파라다이스는 오아시스의 분수가 샘솟고 과일 향이 그득한 유실수가 줄지어 그늘을 이루며, 아름다운 새소리와 함께 벌과 나비가 찾아드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함께 잘사는 이상향을 꿈꾸었다. 키루스의 통치 목표였다.  
 
『쿠쉬나메』를 비롯한 이란의 많은 고전 작품에는 놀랍게도 파라다이스의 또 다른 이상향으로 신라를 지목하고 있다. 핵 문제를 둘러싸고 아시아의 동서 끝에서 벌어지는 파라다이스 위협 상황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희수 한양대 특훈교수·중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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