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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 다 사주는데 뭐가 불만이야" 소리친 그 남자의 잘못

중앙일보 2019.06.05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91)
지인이 우울증으로 입원치료 중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 시대에도 참 이상하게 사는 부부가 있구나 싶었다. 남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다 사주고 다 해주는데 우울해한다고 타박을 했다. 미용실에도 따라가서 지켜서 있다가 요금을 지불해 주는 것은 물론 심지어 속옷까지도 사다 주었다. 한 번도 제대로 여자 혼자 돈을 써본 일이 없다. 늘 같이 다닌다.
 
지인이 우울증으로 입원치료 중이다. 그의 남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내가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다 사준고 다 해주는데 우울해 한다고 타박을 했다. [중앙포토]

지인이 우울증으로 입원치료 중이다. 그의 남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내가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다 사준고 다 해주는데 우울해 한다고 타박을 했다. [중앙포토]

 
그녀 말로는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고 40년을 넘게 그리 살았다고 한다. 여자의 일생이란 노래의 가사에서는 힘든 인생살이를 참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이야기하지만 재미없는 인생을 사는 것도 힘든 것 같다.
 
대기업 사모님들이 그러면 이해가 되지만 우리 같은 서민은 아니올시다가 아닌가? 여자는 적은 돈으로도 쇼핑하는 재미가 첫째인데 몇 번이나 여자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건만 남편은 이해를 못 했다. 학교 문턱을 안 가봐서 글도 못 읽으니 계산도 당연히 못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도 신경 쓸 일이 없고 남편이 다 해주니 너무 편하고 좋다고 말했다. 배우려고 하지 않고 또 가르쳐 주지 않으면 당연히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맞다.
 
특히 시골은 아직도 무학의 어른들이 많아서 실감이 난다. 이웃에 그런 할머니들이 더러 계셔서 골골하는 남편도 먼저 죽으면 어쩌나 걱정하시는 분도 있다. 돈은 없어서 못쓰지, 계산이 서툴러도 조금만 실전에 대응하면 다 알아서 살림을 살 줄 아실 텐데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사시다가 세월만 간듯하다….
 
 
아이들이 다 자라 부부만 남고 보니 남편은 밖으로 나도는 일이 많아지고 부인은 꼭두각시 같은 삶이 무료하고 허무해서 종일 누워 있곤 했다. 잠이 오지 않아 약 먹는 일이 잦아지고 그러다가 쓰러지신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여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밖으로 나가야 정상인데 잘해준다고 한 것이 환자로 만들어 버린 결과가 되었다.
 
내가 5살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새엄마가 왔다. 엄마는 강원도 삼척의 첩첩 산골 가난한 집 형편에 당연히 학교 문턱도 못 가본 여자였다. 훗날 우리가 어른이 되고 이런저런 삶의 대화를 될 때 엄마가 해주신 이야기이다. 아이 딸린 집에 시집온 글 모르는 처녀 엄마에게 아버지는 출근할 때마다 숙제를 내어주고 나가셨단다.
 
아버지는 출근할 때마다 엄마에게 숙제를 내어주고 나가셨단다. 어린 우리가 커서 글 모르는 엄마를 무시할까 봐 아버지는 엄마의 선생이 되어 주셨다. 사진은 영화 '칠곡 가시나들'에서 글을 배우는 할머니 모습. [중앙포토]

아버지는 출근할 때마다 엄마에게 숙제를 내어주고 나가셨단다. 어린 우리가 커서 글 모르는 엄마를 무시할까 봐 아버지는 엄마의 선생이 되어 주셨다. 사진은 영화 '칠곡 가시나들'에서 글을 배우는 할머니 모습. [중앙포토]

 
국어도 있고 산수도 있었는데 국어는 주기도문 문장을 한 줄씩 쓰고 외우기, 산수는 숫자로 문제를 써주시고 종이돈과 동전을 쟁반에 담아놓고 더하기 빼기를 하며 답을 쓰게 하는 거였다. 어린 우리가 커서 엄마를 무시할까 봐 아버지는 엄마의 선생이 되어 주셨는데 한 번도 야단을 치거나 혼을 내신 적 없고 늘 잘했다고 격려해 주셨단다.
 
드디어 어느 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월급이 두둑이 든 봉투를 내밀어 잘 계산해서 써보라고 하셨다. 엄마는 죽는 날까지 그날의 가슴 뛰던 감동을 잊지 못하시고 아버지를 평생 스승 대하듯 하셨다. 
 
엄마는 아버지 앞에서 주기도문 읽기 시험을 치른 것을 가끔 이야기하시며 종일 잘 외운 주기도문이 아버지 앞에서 읽을라치면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맨날 울었다고 소녀같이 웃었다. 우리가 결혼하고 나이가 들었을 때 엄마는 큰돈이 오가는 밭떼기 장사를 하셨다. 장부 책을 옆구리에 차시고 팔달시장을 몸빼바지 펄럭이며 큰손으로 사셨다. 
 
부부로 살기는 쉽고도 어려운 일이지만 나이가 들면 부인이 선두에 서야 집안이 평안하다. 때론 답이 보이는데도 못 알아보는 것 같아 답답할 때도 있지만 이 또한 다른 각도로 보면 답이 아닐 거란 생각에 입을 다문다. 병문안 가는 길에 잠시 어수선한 마음을 써본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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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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