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라진 원주민 여성 1200명···캐나다 추악한 진실 드러났다

중앙일보 2019.06.05 05:00
2002년 캐나다 밴쿠버 외곽의 코퀴틀람의 한 돼지농장을 경찰이 급습했다. 이곳에서 경찰은 불법 총기류와 함께 의문의 여성 소지품과 피 묻은 옷가지 등을 발견했다. 돼지농장 주인 로버트 픽턴(당시 58세)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수사 끝에 그가 밴쿠버 다운타운 이스트사이드 홍등가에서 사라진 여성들을 살해하고 이들의 시신을 훼손해 일부 돼지먹이로 준 엽기 행각이 밝혀졌다.  
 

트뤼도 총리, 1200쪽짜리 진상규명보고서 발표
인구 4%인 원주민 여성, 살인피해 16% 달해
"인종 이유로 한 집단학살 수준의 폭력 있었다"

픽턴은 최소 26명의 살해 혐의를 받았으나 이 중에 6명에 대해서만 기소돼 2007년 종신형을 받았다. 그의 범죄는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됐다. 캐나다 역사상 최대 연쇄살인극으로 주목받은 이 사건은 특히 희생자들 중에 원주민(indigenous)이 많아 논란을 불렀다. 연쇄 실종 보고를 당국이 묵과하고 적극 수사하지 않아 사실상 이들의 희생을 방조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다.
 
캐나다에서 1980년 이후 30여년간 사라지거나 살해된 원주민 여성은 약 1200명에 이른다. 일각에선 4000명이라는 주장도 한다. 2015년에도 15세 원주민 소녀 티나 폰테인이 위니펙 레드강에서 주검으로 발견됐지만 살해 혐의로 기소된 50대 백인 남성은 무죄 방면됐다. 캐나다 사법 체계가 원주민에게 차별적이라는 비판이 들끓었다.  
 
3일(현지시간)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원주민 여성 살해·실종에 관한 국가보고서 발표회에서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폐막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3일(현지시간)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원주민 여성 살해·실종에 관한 국가보고서 발표회에서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폐막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약 3년에 걸친 조사 끝에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이끄는 캐나다 내각이 이 같은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트뤼도 정부는 3일(현지시간) 원주민 여성 살해·실종에 관한 최종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이누이트와 메티스 등 캐나다 원주민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에 대해 "인종을 이유로 한 집단학살(genocide) 수준의 폭력"이 가해졌다고 공식 인정했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에 따르면 이번 최종보고서는 1980∼2012년 원주민 여성 1017명이 살해됐고 164명이 실종됐다는 2014년 캐나다 왕립 기마경찰대(RCMP) 보고서와 관련해 3년 가까이 진행한 조사 결과를 담고 있다. 총 9200만 캐나다달러(약 811억원)가 투입됐다. 1200쪽짜리 보고서는 2017년 이래 폭력 생존자 및 가족 등 2000명으로부터 채집한 증언도 담겼다. 한 여성은 "나는 어디를 가든지 두렵다. 그런 공포는 매일 느끼는 것이라서 마치 자신의 일부인 것 같다"고 진술했다. 이 여성의 여동생 역시 의문사를 당했다.
 
캐나다 원주민은 유럽인들이 북미 대륙에 들어오기 전부터 캐나다 지역에 살았던 ‘퍼스트 네이션(First Nations·선주민족)’을 가리킨다. 이누이트 족을 포함해 혼혈 인디언인 메티스 등으로 구성돼 있다. 2016년 기준 97만7000명으로 캐나다 전체 인구의 3%에 못 미친다. 대부분 빈곤한 상태에다 도심 외곽에서 매춘‧마약 등에 연루돼 살아가는 이들이 많아 범죄에 쉽게 노출되는 편이다.  
 
보고서는 원주민 여성들에게 오랜 차별에 기반한 폭력이 가해졌고 캐나다 정부는 이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들의 죽음이 빈곤, 인종차별, 성차별, 정신적 외상, 가족과의 분리로 인한 문화의 상실, 토지 강탈 등과도 관련이 있다는 분석도 곁들였다. 캐나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캐나다 여성 가운데 원주민은 4%에 불과하지만 살인 피해자 비율은 16%에 이른다. 
3일(현지시간)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원주민 여성 살해·실종에 관한 국가보고서 발표회에서 원주민 청소년들이 쥐스탱 트뤼도 총리에게 보고서를 전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3일(현지시간)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원주민 여성 살해·실종에 관한 국가보고서 발표회에서 원주민 청소년들이 쥐스탱 트뤼도 총리에게 보고서를 전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매리언 불러 조사위원장은 이날 열린 보고서 제출행사에서 "식민주의, 차별, 대량학살이 원주민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에 대한 폭력의 비율이 높은 이유"라고 말했다. 행사에 참석한 트뤼도 총리는 "우리는 그들의 실종, 폭력, 심지어 죽음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분류되거나 무시되는 것을 몇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며 "이는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끝내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트뤼도 총리로선 이번 조사 발표가 2015년 11월 취임 때 공언한 대표 공약 하나를 마무리하는 격이다. 앞서 원주민 사회와 인권단체는 원주민 여성 실종 및 살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해왔으나 역대 정부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트뤼도는 2015년 총선에서 이 문제 해결을 포함해 ‘원주민과의 화해 정책’을 약속한 바 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