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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의 시시각각] ‘코리아 퍼스트’ 외교

중앙일보 2019.06.05 00:05 종합 30면 지면보기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헝가리 다뉴브 강은 비극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이 강을 보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다뉴브강)’이란 명곡을 작곡했다지만, 우리에겐 그저 슬픔의 강일 뿐이다. 사고가 난 지 1주일이 다 되도록 수색에 이렇다 할 큰 진전이 없다. 유속과 수위를 거론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고수습에 대처하는 자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헝가리 잠수사들은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물에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 잠수사들이 세월호 참사 때 목숨을 걸고 바다로 뛰어든 것과는 다르다. 헝가리 ATV가 “한국인들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살아간다. 한국은 참사가 발생했을 때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한다”고 분석한 게 핵심을 짚었다. 난 남들이 뭐라 해도 우리의 이 같은 ‘기민한 대응’이야말로 으뜸 경쟁력이라 생각한다.
 

수단을 목적으로 삼으니 외교 꼬여
키신저의 말 “국익만이 영원하다”
우린 왜 ‘코리아 퍼스트’ 못 하나

그런데 이게 외교에선 영 딴판이다. 청와대 눈치를 보다 아니다 싶으면 꼼짝을 않는다. 그리고 방치한다. 대일 외교부터 보자. 지난해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이후 우리 정부는 8개월 동안 일본의 대화 제의에 일절 응대하지 않았다. 뭔가 나름의 비전과 소신이라도 있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 미국과 여론의 압박이 있자 부랴부랴 G20 정상회의 때 한일정상회담을 하려고 달려든다. 만난 들 일본이 “이제 사이좋게 지내자”고 할 것 같나. 때가 있는 법이다. 그래야 협상력도 나온다. 일본은 항공모함과 같다. 방향을 틀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방향을 틀면 무섭게 돌진한다.
 
중국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모호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사드 보복이 2년 넘게 진행 중이다. 그 뿐인가. 중국이 외교 결례를 거듭하고 미세먼지에 책임이 없다고 정색을 해도 제대로 항의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외교에 주인의식이 없으니 그저 다음으로, 뒷사람에게로 미룬다. 그런다고 중국이 북한 비핵화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지도 않는다. 대미 외교에선 트럼프를 사로잡은 아베의 섬세함도, 조지 W 부시를 감동시킨 노무현의 유연함도 찾아보기 힘들다. 실현 가능성은 별개로 치더라도 전략적으로라도 기개와 기지가 넘치는 건의를 내놓는 참모가 보이질 않는다. 기껏 미국에 제시한 카드가 11년 전까지 써먹던 ‘대북 식량 지원’이다. 하기야 미국을 좀 안다는 외교관은 대부분 변방으로 밀려나 있으니 할 말 없다.
 
이스라엘 외무장관이던 시몬 페레스가 생전에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다비드 벤구리온 초대 총리에 이렇게 물었다 한다. “총리님, 왜 그렇게 문제 많은 모세 다얀(외교·국방장관 역임)을 늘 곁에 끼고 계십니까.” 벤구리온의 답은 이랬다. “말해줄까. 다얀은 100개의 아이디어가 있어. 그중 95개는 위험해. 그리고 3개는 (현실에) 안 맞아. 그런데 나머지 2개가 기가 막히게 훌륭해.” 다얀의 창의적 발상, 그리고 그걸 골라 채택한 지도자 벤구리온의 혜안 덕분에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와의 ‘6일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영토를 세배로 늘렸다. 지금 우리에겐 그런 다얀과 벤구리온이 있는가.
 
두세 발짝 느린, 비에 젖은 낙엽처럼 바짝 엎드린 우리 외교 위기의 정점에는 외교 철학의 부재가 있다. 강대국에 둘러싸이고 북한과 대치하는 우리에겐 올바른 우선순위 설정이 필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걸 ‘한반도 평화’에 뒀다. 나머지 한·일, 한·중, 나아가 북한 문제도 수단으로 여겼다. 수단에 불과하니 “감정이 상한다”, “내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내팽개칠 일도 없었다. 철저한 실리위주 국익 외교였다. 지금 문재인 정부의 외교는 어떤가. 우선순위는 ‘북한’이다. 모든 주변국 외교는 수단 아닌 목적으로 접근한다. 목적에 안 맞으면 다가가질 않는다. 그러니 상대방의 불신은 깊어지고 관계는 꼬인다. 국익은 증발한다. 키신저는 “미국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국익만이 영원하다”고 했다.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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