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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중앙일보 2019.06.04 00:16 종합 35면 지면보기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중앙일보 주필과 사장·발행인·편집인을 지낸 권영빈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 희수(喜壽)를 맞아 책을 냈다. 『나의 삶 나의 현대사』란 칼럼집이다. 자신의 인생 역정을 한국 현대사와 연결시켜 그동안 쓴 칼럼을 해설과 함께 다섯 마당으로 정리했다. 그중 셋째 마당에 해당하는 ‘두 개의 폭력’은 전두환 독재 시절 몸소 겪은 언론 탄압의 민낯을 다루고 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내 뺨을 후려갈겼다. ‘이 새끼 빨갱이 아냐’ 하며 서류를 홱 던지고는 도주 경로를 대라고 윽박질렀다.” 경찰에 쫓기던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소속 인사를 집에 잠시 머물게 한 게 문제가 돼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고, 그때 맞닥뜨린 사람이 훗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유명해진 이근안 경감이었다는 것이다. “머뭇거리고 더듬거리면 한쪽 어깨를 탁 쳤다. 그러면 팔과 어깨가 분리돼 덜렁거렸다. 곧이어 어깨를 탁 치면 다시 원상으로 돌아갔다.” 기술자의 탁월한 기량에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남영동은 한수산 필화 사건으로 끌려간 서빙고 보안사 분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발가벗긴 채 두 평 남짓한 방에서 주먹이 솥뚜껑만 한 청년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하고, 다리 사이에 각목을 끼운 채 군홧발에 짓밟히고,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중앙일보에 연재되던 한수산의 소설 중 일부 대목을 문제 삼아 국가원수를 모독하고, 군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겼다고 무자비한 폭력을 가한 것이다.
 
언론인에 대한 공권력의 야만적인 폭력은 민주화와 함께 사라졌다. 물리적 폭력이 무서워 할 말을 못 하고, 쓸 것을 못 쓰던 시대는 지났다.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발표한 ‘2019년 세계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세계 180개국 중 41위를 기록했다. 미국(48위)이나 일본(67위)보다 높다. 아시아에서는 최고 순위다. 노무현 정부 때 31위(2006년)까지 오르기도 했지만,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에는 70위까지 떨어졌다. 문재인 정부 들어 다시 올라가기 시작해 지난해 43위로 급상승했고, 올해 다시 두 계단이 올랐다.
 
올해로 경력 35년 차인 기자 개인의 느낌으로는 요즘처럼 언론이 대통령과 정부·여당을 자유롭게 비판하고 공격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하루가 멀다고 저주와 조롱에 가까운 비판을 쏟아내고 있는 언론도 건재한 걸 보면 언론의 자유만큼은 보장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강효상 자유한국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은 지난달 초 3급 국가기밀인 한·미 정상 간 통화 내용을 주미한국대사관에 근무하는 고교 후배로부터 입수해 폭로했다. 발끈한 청와대와 외교부가 내부 감찰을 통해 해당 외교관을 파면하고, 강 의원을 외교상 기밀 누설 혐의로 형사고발 하는 등 법적 대응에 나서자 강 의원은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한 언론 탄압이라고 맞서고 있다.
 
강 의원이 기자회견과 보도자료를 통해 폭로한 내용은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5월 말 일본을 방문할 때 한국에도 들러달라고 간청했고, 트럼프는 ‘흥미로운 제안’이라며 ‘볼턴 보좌관에게 검토시키겠지만, 가더라도 귀로에 잠깐 들르는 정도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기밀 누설 파문이 일자 ‘한국 패싱’, ‘구걸 외교’의 심각성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지만, 그의 기자회견 발언이나 보도자료 어디에도 그런 뉘앙스로 비칠 만한 대목은 없었다. 국민 입장에선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가 위법 논란을 무릅쓰고 정상 간 통화 내용을 굳이 폭로하는 무리수를 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함으로써 내년 총선에서 지역구(대구 달서병) 공천을 확보하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개인적 욕심 말고는 달리 설명하기 어렵다. 공천을 따낼 경우 그는 ‘진박’의 적자(嫡子)인 조원진 대한애국당 대표와 지역구에서 맞붙을 가능성이 크다.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이름을 알리는 게 목적이라면 그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그는 “개인적으로 참고만 하겠다”고 후배를 속여 기밀을 빼냈다. 그걸 믿고 누설한 후배는 공무원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파면이란 중징계를 당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정상 간 통화 내용까지 유출하는 믿기 힘든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한·미 간 신뢰 관계에 구정물을 뿌렸다. 강 의원은 사익을 위해 전도유망한 후배의 앞길을 망치고, 그토록 중시하는 한·미 관계를 스스로 훼손했다. 그런 강 의원을 감싸는 한국당은 당리당략을 위해 국익을 팽개쳤다는 지탄을 면키 어렵다.
 
집권이 목적인 야당이 정부·여당을 견제하고 공격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공격을 하더라도 최소한 말이 되게 해야 한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않은 채 비판을 위한 비판, 대안 없는 공격을 일삼는데도 다수 국민이 표를 줄 거라 기대한다면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언론 자유가 만개한 상황에서 언론 탄압과 좌파독재 운운하는 한국당은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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