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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수의 시선] ‘노무현의 송광수 임명’이 제도화되기를

중앙일보 2019.06.03 00:03 종합 29면 지면보기
조강수 논설위원

조강수 논설위원

역대 검찰 총장 인사(人事)의 궤적을 되짚다보면 두 개의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를 만나게 된다. 1997년 김영삼 대통령이 낙점한 김태정과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낙점한 송광수의 임명이다. 김태정은 그해 대선 직전 ‘김대중 비자금 사건’ 수사의 유보를 결정했다. 새로 들어선 DJ정부의 재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정치권력과 연결된 게 독이 됐던지 ‘옷로비 사건’ 수사 중 구속되는 수모 끝에 추락했다.
 
송광수는 다른 길을 걸었다. 원래 임명권자인 노 대통령과는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취임 12일만에 ‘평검사와의 대화’ 자리를 마련한 노 대통령은 “DJ정부 말에 임명된 검찰 수뇌부를 못 믿겠다”고 공표했다. 김각영 총장이 사표를 내면서 검찰은 혼돈에 휩싸였다. 그런 상황에서 검찰 출신 여당 의원이 “굉장히 균형감이 있고 신망이 두터우며 후배들을 엄청 깨는데도 정확한 지적에 검사들이 아무 반박도 못하는 고검장이 있다”며 마산 출신 송광수를 추천하자 노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친노(親盧) 진영 인물이 아닌 중립 인사를 중용한 셈이다.
 
그해 말 여야의 ‘대선자금’ 사건 수사가 물밑에서 진행될 때였다. 송광수 검찰총장의 집으로 청와대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세수를 하고 있다가 받았더니 노 대통령이 ‘총장님, 바쁘겠지만 대한민국 선거라는 것이 돈이 참 많이 듭디다. 언제 한번 들어오셔서 그 문제를 상의했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당시 최도술이라는 대통령 심부름꾼(※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기업에서 돈을 받았다는 첩보를 입수해 자금추적을 계속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3~4초간 생각하다가 ‘대통령님 그런 문제의 의논 상대로 저를 생각해서 불러주시는 것은 감사한데 저희들이 혹시 대통령 선거자금에 대해서 수사를 할일이 생기고 제가 대통령님을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국민들이 수사결과를 믿어 주겠습니까’라고 완곡히 거절했다. 그랬더니 그대로 3~4초간 가만히 계시더니 ‘그 생각도 맞네요. 알았습니다’라고 하고는 끊었다.”
 
이후 최도술 사건이 수면위로 드러나자 노 대통령은 측근의 잘못에 대해 직접 사과하면서 “수사가 끝나면 대통령직 재신임을 받겠다”고 폭탄선언까지 했다. 지금 봐도 대통령이 들어오라는데 거절한 검찰총장도 강심장이지만 그런 거절을 납득하고 수용한 노 대통령의 포용력도 대단했다. 자신의 뜻을 번번히 거스르는 검찰의 수장에게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지시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이런 저런 구실을 갖다붙여 중도 퇴임하게 할 수 있었음에도 그의 의견을 끝까지 존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선 자금 수사가 끝난 후 청와대에서 대검 중수부 폐지 얘기가 나오자 송광수는 “제 목을 먼저 치라”며 반발했다. 문재인 대통령 등 참여정부 인사들이 검찰 개혁 실패의 원인 중 하나로 송광수의 총장 낙점을 꼽을 정도였다.
 
노 전 대통령과 송 전 총장간의 비화는 요즘 상황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수사 독립성 확보를 위해서는 검찰총장의 수호 의지와 그걸 지켜주려는 대통령의 의지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제일 큰 건 인사다. 검찰 개혁의 출발점은 인사이고 종착점이 제도다. 국회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절차)을 거쳐 검찰권을 견제할 아주 강력한 칼(제도)이 새로 만들어진다 해도 칼을 쥔 자가 제대로 쓰지 않으면 흉기가 될 수 있다. 제도를 바꾸어도 인치(人治)가 가능하게 만든다면 헛수고다. 이달 중반의 문무일 검찰총장 후임자 인선은 그래서 중요하다.
 
대검 차장·법무 차관 등 고검장급과 서울중앙지검장을 중심으로 검증 및 후보 추천 절차가 진행중이다. 누가 될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최근 검찰 기수가 가장 낮은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의 총장 내정설이 급부상하고 있다. 검경 수사권 조정 등에 대한 문 총장의 반발 이후 조직 장악력이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보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송인택 울산지검장이 국회의원 전원에게 보낸 검찰 개혁방안에서 ‘대통령이나 정치 권력이 검사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 없도록 독립적인 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고 한 것에, 필자는 동의한다. 어쩌면 노 대통령도 송광수 임명을 후회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길게 보면 양측이 다 손해볼 게 없는 인사였다. 그 때 대선자금 수사가 묻혔더라면 그 이후 보수 정권에서 어떤 치도곤을 맞았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차라리 그런 엇갈린 운명의 인사를 제도화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나은 개혁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외쳐도 공염불일 가능성이 크지만….
 
조강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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