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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배준호 교수에게 듣는 韓·日 ‘100년 기업’ 격차의 비밀

중앙일보 2019.05.31 15:00
日 장수기업의 번성은 도시 상공인 계급을 우대한 역사적 실용성에 바탕 둬
유교를 교조적으로 수용한 조선은 상공업 천시… 거상의 재산은 ‘여차하면 내 것’ 치부
 
배준호 한신대 명예교수는 일본 기업의 영속성에 대해서 한국 지도자들이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현실을 우려했다.

배준호 한신대 명예교수는 일본 기업의 영속성에 대해서 한국 지도자들이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현실을 우려했다.


독일의 저명한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하느님이 다스리는 이 땅이 부(富)로 풍요로워진다면, 하느님의 선하심과 정의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빈곤과 결핍은 전지전능한 하느님을 욕되게 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청빈을 강조한 중세 가톨릭에 대항한 프로테스탄트 청교도의 청부(淸富)정신이 자본주의 발전의 씨앗이 됐다는 시선이다. 이 관점을 한국과 일본에 적용하면 양국의 자본주의, 보다 구체화하면 기업가와 그 이윤을 바라보는 역사적 경로가 어떻게 다른지도 접근할 수 있다.
 
 
오태헌 경희사이버대학교 일본학과 교수의 2017년 논문 ‘한·일 장수기업 비교 연구’에 따르면 S&P 지수에 등재된 전 세계 90개 기업의 평균 수명은 65년이었다. 한국 기업 평균 수명은 20년 수준이다. 1965년 당시 국내 100대 기업 중 30년 후에도 생존한 곳은 16개뿐이었다. 100년 이상 기업은 두산(1896년)과 동화약품공업(1897년) 2곳이 고작이었다.
 
 
반면, 일본은 창업 후 100년 이상 생존한 기업이 대략 5만 개, 200년 이상 3146개, 500년 이상 32개 그리고 1000년을 넘은 기업도 7개로 나타났다. 정후식 한국은행 해외조사실 부국장의 2008년 논문 ‘일본 기업의 장수요인 및 시사점’에 따르면 백제에서 건너 온 콘고 시게미쓰가 578년 창업한 건설회사 콘고구미(金剛組)는 세계 최고(最古) 기업이다.
 
 
창업 후 200년 이상 지속된 전 세계 기업(5586사) 중 56.3%가 일본에 있다. ‘시니세’(老鋪)는 선조의 가업을 적어도 2대 이상 지속하고 있는 기업을 지칭한다.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경제학 박사, 한국조세연구원 연구위원과 기획예산처 자문위원, 국민연금연구심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배준호(67) 한신대 명예교수는 한·일 비교사를 연구한 학자다. 5월 3일 월간중앙 대회의실에서 만난 배 교수에게 한·일 장수기업 격차의 이유를 물었다. 그는 “양국이 유교를 어떻게 체화시켰는지에 따라, 상공업 가업 승계와 기업가 정신에 대한 의욕이 갈렸다”고 진단했다.
 
 
상업을 불로소득으로 여긴 조선
일본 효고현의 다쓰우마혼케는 35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다쓰우마 겐지는 이 회사의 16대 사장이다.

일본 효고현의 다쓰우마혼케는 35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다쓰우마 겐지는 이 회사의 16대 사장이다.

일본과 달리 고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사업체는 왜 오늘날까지 남아있지 않을까?
 
“동아시아 역사에서 사농공상(士農工商) 위계가 가장 심하게 발현된 시대는 조선 500년이었다. 신분 이동이 쉽지 않았다. 자식 세대가 계속 공인, 상인으로서 가업을 잇기를 바라지 않는 사회였다. 반면, 일본에서 사(士) 계급은 사무라이였고, 농(農)·공(工)·상(商)의 신분 차별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가업 승계가 미덕 내지 관행으로 여겨졌다. 상공인의 소득 수준이 낮지 않았고, 부를 축적한 명인(名人)급 상인, 공인이 다수 나왔다.”
 
 
원하지 않아도 승계되는 구조였다면 조선시대 가업(家業)에 관한 자발적, 창의적 풍토가 떨어졌겠다.
 
 
“특히 상인은 그 지위가 가장 낮았다. 다수가 양인(良人)인데 천인(賤人)에 가깝게 대했다. 돈 많이 벌어서 거상(巨商)이 됐어도 신분 세탁부터 생각했던 사회였다. 자식들이 과거에 도전하거나 농업에 종사하기를 희망했다.”
 
 
왜 조선의 위정자들은 부국강병의 근간인 상공업을 천시했을까?
 
 
“유교를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탓이다. 지배층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부분만 뽑아서 전파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농업, 공업과 달리, 상업을 ‘땀 흘리는 수고 없이 매점매석 등으로 이문을 챙기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부가가치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고, 수요공급에 따라 물건 가격이 달라질 수 있는 원리를 납득하지 못했다.”
 
 
일본은 유교를 이데올로기가 아닌 실용적 차원으로 수용한 듯하다.
 
 
“사무라이들은 유교를 허학(虛學)이라고 무시했고, 학자들을 중시하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연 뒤, ‘하극상의 칼잡이’ 가치관을 바꿔야겠다고 생각에 유교를 활용했다. 그것도 그냥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일본의 고학(古學)·양명학·고증학·난학 등과 융합시켰다. 다른 교리와 학문을 신축적으로 받아들이는 도량이 있었다.”
 
 
그 시대의 일본도 상인, 공인 가문의 아들이 무사가 되길 갈망하지 않았을까?
 
 
“일본은 상인의 이익을 노력의 대가로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 배경에는 조선에 견줘 발달한 도시와 도시 거주 양민인 조닌(町人)층이 자리한다. 에도(도쿄)·오사카·교토 등 대도시와 전국 각지의 중소도시 성하마을의 일상용품 조달을 상인과 공인, 즉 조닌 계층이 담당했다. 마츠리(축제)·가부키(공연)·우키요에(미술) 등 서민문화의 공급자이자 수요자였다. 조선처럼 중앙집권이 아닌 분권체제인 일본에서 지역 간 경쟁 분위기가 조성됐고, 조닌층을 통해 지역의 경제·문화 수준이 올라갔다.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망과 숙박이 정비될수록 상업은 한층 발전했다.”
 
 
조선에도 드물지만 거상들이 있다. 정부 권력과의 관계는 어땠나?
 
 
“아무리 부자라 해도 지역 현감·현령·사또에게 살살 기어야 했다. 관찰사나 중앙정부 고위층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거상의 재산은 ‘여차하면 내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수탈과 착취가 용이했다. 19세기 말엽 개성상인 손봉상·공성학·김정호·박우현 등이 중심이 돼 영신사·개성사·개성전기주식회사·고려삼업주식회사·송고실업장 등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의 시부사와 에이이치처럼 개화기에 근대 기업으로의 경영 혁신을 주도할 ‘체인지 메이커’가 조선에는 없었다.”
 
 
이런 환경에선 가업을 이어가며 사업을 계속할 요인이 생기기 어렵다.
 
 
“그래서 대(代)를 이어 명망이 이어진 집이 없는 것이다. 3대가 이어지면 가업이 돼서 역사와 기록에 나올 텐데…. (지주 외에 상공업 쪽에선) 그런 가문이 거의 없다. 채제공의 [번암집]에 나오는 제주의 여성 거상 김만덕 등의 이름이 종종 나오는 수준이다. 상공인 출신이 양반으로 신분을 바꿔 조정에서 역할을 한 사례도 거의 없다.”
 
 
일본의 지방분권(分權) 시스템, 상공인 계층을 배양하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꼽히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새 1만엔 권의 모델로 선정됐다. 시부사와의 초상은 구한말 일본 중앙은행 발행 지폐에도 들어간 바 있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꼽히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새 1만엔 권의 모델로 선정됐다. 시부사와의 초상은 구한말 일본 중앙은행 발행 지폐에도 들어간 바 있다.

일본은 달랐나?
 
“일본은 명예·권력·부가 나뉘어져 있었다. 명예는 왕과 귀족들, 권력은 사무라이, 부는 상인이 가지고 있었다. 상인 가문의 고니시 유키나가, 다도의 명인 센노 리큐 등은 무사나 관료가 됐다. 근대의 사카모토 료마, 이와사키 야타로, 시부사와 에이이치 등 무사 출신들도 무역과 사업에 몸담았다. 이들이 일본의 경제적 근대화 작업을 선도했고, 도시 조닌층도 가업을 근대적 회사 형태로 조직화, 대형화시켰다.”
 
 
상인의 부는 정치권력인 사무라이가 내놓으라 하면 내놓는 거 아닌가?
 
 
“아니다. 사무라이는 자기 영역의 최고 권력자이긴 해도 착취는 생각할 수 없었다. ‘분권(分權) 사회’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사또, 관찰사를 하면 1~2년을 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구조였다. 다시 돌아가니까, 그 사이 수탈과 착취를 했다. 그러나 일본은 영주가 자신 영지의 백성들과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수탈을 못한다.”
 
 
일본이 ‘와(和)’를 중시한 것도 이런 전통에서 기인했겠다.
 
 
“분권 사회는 가업, 장인정신을 중시한다. 기능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일본이라는 사회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선은 왕이 나라의 대표였다. 왕이 누군가를 불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가차 없이 내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국가의 기능이 한양에 집중됐던) 조선과 달리 역사적으로 일본은 지방 도시들이 발전한 것이다.”
 
 
이런 구조였으면 일본의 상공업 계층에도 나름의 권력이 있었겠다.
 
 
“가령 여관의 경영주 모임이 해당 지역에서 독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상공인들이 영주(다이묘)의 가신들과 함께 일을 도모했고,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경직되게 해석된 조선의 성리학 규율은 ‘내로남불’처럼 기득권에게만 유리하게 적용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 (이런 사회구조에선) 업(業)에 대한 자긍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공인(工人)의 대부분은 세습노비였다. 공인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조선은 노비 중심 사회였다. 가령 조정에 납품하는 그릇도 양인 신분의 장인이 만든 것을 사들이기도 했지만, 노비가 만들기도 했다.”
 
 
‘노비가 하는 일’이라는 이미지가 있으니 장인정신이 계승되기 쉽지 않았겠다.
 
 
“조선 후반부 250년에서 상공업 진흥은 정부 정책 우선순위에 없는 수준이었다. 가령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도로 정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산업과 유통업을 진흥시키려면 도로가 정비되어야 했는데 ‘해놓으면 외적의 침입만 빨라진다’는 인식이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그린 것을 정부가 탐탁하지 않게 본 것도 같은 이치다.”
 
 
가업승계는 혈연(血緣)이어야만 하는가?
한국의 대표 장수기업인 유한양행 본사. 1926년 유일한 박사에 의해 설립됐다는 표식이 보인다.

한국의 대표 장수기업인 유한양행 본사. 1926년 유일한 박사에 의해 설립됐다는 표식이 보인다.

조선의 부(富)는 토지를 가진 양반지주들한테 쏠릴 수밖에 없었겠다. 제조·금·상공업을 일으킬 의욕도 없고, 대대손손 물려주기는 더 어려운 구조였겠다. 자본가들의 탐욕과 별개로 이런 풍토가 현재에도 우리 뇌리 속에 입력되어 있기에 기업가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인 편은 아닐까?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조선과 같은 지역이지만 아주 다른 나라라고 본다. 다만 경제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친 뒤 기업인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이 있는 것은 현실이다. 부를 창출하는 과정이 깨끗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재벌을 옹호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압축성장 과정에서 대기업의 천민자본주의적 속성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지 않았을까?
 
 
“깨끗하게 컸다는 유한양행(1926년 창업)이 중견기업 수준에 머물러있다. 모범이 될 만한 사례가 적다. 역사적인 뿌리가 기업가의 이미지를 왜곡했고, (고도성장기 정경유착에 천착한) 적잖은 기업인의 탐욕이 그 왜곡을 더 증폭시킨 면이 있다.”
 
 
일본은 혈족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풍토가 아니라는데?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대로, 가신은 가신대로, 농민은 농민대로 가업을 이어오는 가문의 관행이 있었다. 아들이 없거나 죽으면 양자를 데리고 왔다. 형님, 동생 집안에서 들일 때도 있었지만 양자를 받아들이는 것에도 거부감은 없었다. 이런 풍토가 있었기에 기업인들이 내 집안의 아들, 딸보다 주변의 가장 똘똘한 사람에게 물려주는 것을 당연시한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기업 운영인가?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혈연에 의한 경영 이후 20년 이상 전문경영인이 맡았다. 이후 다시 창업자의 3세 후손인 도요타 아키오로 경영권이 내려왔다. 경영인으로 전면에 나서기 전, 도요타 아키오는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었을 뿐, 회사를 좌지우지하는 결정에 관여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이웃나라이지만 가업 승계를 바라보는 멘털리티 자체가 우리와 다른 것 같다.
 
 
“완전히 다르다. 문제는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전 TV에서 본 기억으로 도쿄대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가 가업을 잇고자 여관업으로 들어갔다. 이런 일이 보편적인가?
 
 
“빈번한 일은 아니지만 종종 있다. 가업이 끊어지거나 쇠약해질 염려가 있다면 똘똘한 아들이라도 공무원, 변호사를 그만 두고 가업을 잇는 경우가 있다.”
 
 
대기업의 후계자도 아니고, 영세한 업체의 가업을 왜 잇나?
 
 
“독립적인 변호사, 대기업 부장으로 일생을 마치는 것보다 작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을 거느린 가업을 잇는 데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직원과 그 가족들의 생계가 걸린 문제란 책임의식이 작동하는 것이다. 일본은 오랫동안 무사가 지배했던 사회였다. 무사는 가신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가업 승계는 하나의 피라미드 체계에서 정점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다.”
 
 
똑같이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왔는데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의 흐름을 탔다. 반면 우리는 질곡을 겪었다. 이것은 그 사회의 내재적 토양의 차이 탓일까?
 
 
“에도 막부 시대인 18세기 중반 다누마 오기쓰구가 경제정책을 실행했다. 영지가 2500석밖에 되지 않았는데 지금으로 치면 실장급에서 일약 장관으로 발탁된 것이다. 당시 막부는 근검절약을 모토로 재정을 건전하게 만들어 놨다. 그러나 경기는 죽어 있었다. 경제 활성을 위해 다누마는 규제와 돈을 풀었다. 에도 막부는 중농주의였는데 이 시기에만 예외적으로 상공인이 우대를 받았다. 이를 다누마의 ‘흥청망청 정치’라고 비판해 나라를 망가뜨린 반면교사로 가르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재평가 받고 있다. 일본이 일찍이 상업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산업화에 빠르게 적응한 것도 이 시대의 경험 덕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다누마의 개혁이 알게 모르게 일본 상인들의 DNA에 녹아 있어서 서구 자본주의와 쉽게 동화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의 전환점, 다누마의 ‘흥청망청 정치’
일본의 상인계층은 실질적 세력을 결성한 것인가?
 
 
“조선은 상인층 자체가 없었다. 한양 인구가 25~30만 명일 때, 상인이 모여 사는 곳은 좁았고, 번화가도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에도에는 100만 명이 살았는데 전체 인구 절반이 상공인이었다. 상인이 사는 곳의 면적은 에도의 10%였다. 땅은 사무라이가 대부분 가졌지만, 10%의 상인 거주지에 볼거리·놀거리가 다 있었다. 무사들도 몰래 변장하고 극장과 유곽으로 놀러왔다.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오늘날의 긴자(銀座)가 상인층의 거리였다. 상공업인들은 문화를 발전시킨 계층이었다. 전통 인간문화재를 후원한 이는 무사가 아니라 돈 가진 거상들이었다. 무사계급도 이 사람들한테 빚을 졌다. 경제 권력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서구는 기독교, 한국과 중국은 유교라고 하는 사회를 지배하는 종교 내지 철학이 있었는데 일본은 그런 색체가 옅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칼로 일본을 통일했다. 그런 이가 (쇄국정책을 폈지만) 네덜란드·영국·스페인에 부하를 보냈고 사절과 인사도 나눴다. 우리의 당시 왕인 선조는 이런 생각을 했을까? 무사의 세계는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갖는다. 실용적일 수밖에 없다.”
 
 
인터뷰 기사를 작성할 무렵, 도쿄대 박사 출신인 오태헌 교수가 삼성경제연구소에 기고한 글을 엮은 [일본 중소기업의 본업사수경영]이라는 책을 접했다. 그는 일본 기업들의 장수 비결로 5가지를 꼽았다. ▷본업 중시 ▷신뢰(고객, 협력기업, 종업원, 지역 주민과의 공생 관계 인식) ▷장인정신 ▷혈연을 초월한 가업승계 ▷보수적 자금 운영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상공인을 중시하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다.
 
 
장수기업의 조건은 미래를 선도할 기술력의 보유가 으뜸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그런 기업들이 배양되게 만드는 추동력은 그 사회의 역량이기도 하다. 아울러 그 기업이 공동체에 어떻게, 얼마나 기여하는지가 또 다른 차원의 열쇠일 터다. 배 교수와의 인터뷰를 마친 뒤, 기업 규모의 확장을 곧 기업의 성장으로 여겨온 패러다임이 저물어가고 있다는 실감이 새삼 밀려왔다.
 
 
글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 녹취 정리 이태림 월간중앙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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