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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얼굴에 맵시있는 큰 키' 리스트에 반한 백작부인

중앙일보 2019.05.31 12:00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26)
마리 다구 백작부인. 리스트의 연인으로 잘 알려졌다. 그녀의 살롱은 유명 정치인, 문인, 음악가들이 즐겨 찾았다. Henri Lehmann 그림. [그림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마리 다구 백작부인. 리스트의 연인으로 잘 알려졌다. 그녀의 살롱은 유명 정치인, 문인, 음악가들이 즐겨 찾았다. Henri Lehmann 그림. [그림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리스트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여인 중 하나이며 쇼팽, 상드와도 큰 영향을 주고받은 사람이 마리 다구(Marie d’Agoult, 1805~1876)백작 부인이다. 미모에 교양을 갖춘 마리 다구는 당시 파리의 사교계의 여신으로 유명했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난 그녀는 프랑스어와 독일어에 유창했고 영어도 잘했다.
 
파리에서 학교를 마치고 한때 프랑스 낭만주의를 이끈 시인 알프레드 드 비니(Alfred de Vigny)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녀의 남편 샤를 다구 백작은 그녀보다 15살 위였고 기병대 대령 출신인 훌륭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적인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피아노를 다룰 줄 알았고 성악에도 소질이 있었다. 문학, 역사,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고 지식도 깊었다. 그러나 엄숙한 그녀는 우울증에 쉽게 빠졌다.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로 인해 활력을 잃은 그녀는 나이든 남편과 어울리지 않고 거의 독립적으로 생활했다.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살롱 활동은 삶의 낙이었다. 그녀는 유명 살롱을 즐겨 찾으면서 자신도 살롱을 운영했다. 그녀의 살롱에는 문인, 사상가, 음악가, 그리고 나중에는 정치인도 드나들었다.
 
첫눈에 마리 부인에 반한 리스트
리스트는 1832년 연말에 어떤 살롱에서 만났다. 미모의 마리는 어떤 장소에서든 눈에 띄었고 누구도 그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였다. 리스트를 처음 만났을 때 27세의 마리는 21세의 아이돌 스타에게 향하는 열정을 철저히 감추며 냉정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녀가 쌀쌀맞아 보였지만 리스트는 첫눈에 ‘자기가 얻고 싶어 오랫동안 추구했으나 이루지 못한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리스트의 전기작가 리나 라만(Lina Ramann)이 묘사한 그녀는 이러했다.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 라인강의 여신 로렐라이 같았다. 날씬한 몸매에 고고한 자세, 우아하고 위엄 있는 걸음걸이, 고개는 거만하게 꼿꼿했고 고전풍으로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은 금이 녹아 흐른 듯 풍성하게 굽이쳤다. 표정은 꿈을 꾸는 듯하면서 우수가 서려 있었다.”

 
차갑고 도도한 마리의 얼음 같은 겉모습 안에는 활활 끊는 용암이 감춰져 있었다. 세월이 흐른 뒤 그녀가 쓴 회고록에는 리스트를 처음 본 순간이 기록되어있다.
 
27세의 리스트. Josef Kriehuber 그림, 석판화, 1838. [그림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27세의 리스트. Josef Kriehuber 그림, 석판화, 1838. [그림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문이 열리고 묘한 ‘유령’이 나타났다. 나에게 격한 감정을 일으킨, 내가 만났던 가장 비범한 사람을 표현하는데 ‘유령’ 외에 적절한 표현을 생각해내기는 힘들다. 그는 하얗디하얀 얼굴에 맵시 있는 큰 키 그리고 마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큰 눈은 바다 색깔이었고 머리카락은 햇살에 너울대는 물결같이 빛났다. 아픔을 숨기고 있는 표정은 강렬했다. 마치 바닥을 닿지 않고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결국은 시간문제였다. 둘은 깊이 빠져들었다. 파리 근교 크루아시에 있는 마리의 저택과 파리 시내의 리스트의 아파트를 오가며 은밀히 만났다. 1834년쯤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커플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의 딸이 갑자기 병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자신의 외도에 대한 하늘의 벌이라는 죄책감과 깊은 절망에 빠졌다. 한동안 자신을 가두고 아무도 보지 않았다. 리스트는 상드의 인기 소설 렐리아를 그녀에게 보내는 노력 끝에 그녀를 불러냈다.
 
1835년 리스트의 아이를 가졌을 때 그녀는 집을 떠나 리스트와 함께 스위스로 갔다. 두 사람은 모두 파리 사교계의 중심인물이었으므로 이것은 주변 인사들의 말문을 닫을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리스트는 제네바 음악원에서 교수직을 얻었다. 이후 시간을 두고 두 사람 사이에는 3명의 아이가 태어나는데, 공식적으로는 마리가 리스트의 아이를 낳은 유일한 여인이다.
 
세 아이 중 두 번째 아이 코지마는 뒤에 바그너에게 깊이 빠져 남편을 버리고 바그너의 아내가 되었다. 어머니 마리를 닮아 냉정하지만 총명했던 코지마는 아버지 리스트의 마지막을 챙겼고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바그너의 음악을 기리는 바이로이트 축제를 기획했다. 이 행사는 지금까지 이어져서 지구 상의 가장 유명한 고전 음악 축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
 
프란츠 리스트는 책을 많이 읽었다. 그는 상드의 소설도 읽었고, 그녀를 존경했다. 상드를 만나고 싶어했던 리스트에게 그녀를 소개해 준 사람은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였다. 당시 뮈세와 상드는 사귀고 있었고 리스트는 뮈세 여동생의 피아노 선생이었다. 문학과 음악에 공통의 관심이 있었기에 리스트와 상드는 쉽게 친한 사이가 되었다. 둘은 늦게까지 얘기를 그칠 줄 몰라서 뮈세가 오해할 정도였다.
 
마리는 리스트의 소개로 상드를 알게 되었다. 마리도 상드의 책을 읽었다. 마리는 여성으로서 독립적이고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상드의 문학적 재능과 당당한 자세에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살롱에 상드가 참석하기도 했는데, 상드는 공주 같은 그녀의 외모에 매료되었다. 상드는 마리가 글을 쓸 수 있도록 격려했다.
 
이혼한 상드, 리스트·마리 커플과 어울려
극장의 조르주 상드와 마리 다구. Mathilde Odier 그림, 수채화, 1837, 프랑스 국립협회 도서관(Bibliotheque de l'Institut de France)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

극장의 조르주 상드와 마리 다구. Mathilde Odier 그림, 수채화, 1837, 프랑스 국립협회 도서관(Bibliotheque de l'Institut de France)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

 
상드가 1836년 이혼 소송이 잘 마무리돼 홀가분할 때 맨 처음 한 것은 아이들과 함께 스위스에 있던 리스트-마리 커플을 찾아간 것이었다. 학창시절부터 스위스의 자연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상드였다. 스위스에서 그들은 몇 주간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잊고 신나게 지냈다. 상드는 ‘사슬에 묶인 줄도 모르는 갤리선의 노예들’이라고 자신들을 묘사했다. 당나귀를 타고 여행하던 중 리스트는 샤모니의 한 호텔 등록부에 다음의 기록을 남겼다.
 
출생지: 파르나수스(그리스 신화의 산. 문학과 예술을 상징)
직업: 음악가, 사상가
출발지: 글쎄
목적지: 진리(眞理)
이것을 본 상드도 장난을 쳤다.
 
직업: 놈팡이
여권 만료: 영원(永遠)
발급자: 대중(大衆)의 뜻
 
1836년 여름이 지났을 때 리스트-마리 커플은 스위스 생활을 정리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마리는 유서 깊은 프랑스 호텔(Hôtel de France)에 거처를 정하고 전에 운영하던 살롱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상드를 같은 건물의 아래층으로 끌어들였다. 상드는 파리에 있을 때면 그곳에 머물렀다. 상드의 친구는 마리의 친구가 되었고 마리의 친구는 상드의 친구가 되었다. 상드의 친구 중에는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가 많았기 때문에 마리의 살롱은 정치색채가 짙어졌다.
 
마리의 우울증과 가끔 폭발하는 감정은 리스트를 어렵게 했다. 리스트의 자유로운 정신과 끊임없는 여자관계도 둘 사이를 방해했다. 마리는 그가 가정에 붙어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리스트는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마리의 반대에도 연주 여행을 핑계로 마리의 곁을 자주 떠났다. 결국 둘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리스트와 헤어지고 난 후 마리는 다니엘 스턴(Daniel Stern)이라는 필명으로 저술 활동을 했다. 소설 ‘넬리다( Nélida)’는 리스트와 자신의 관계를 소재로 쓴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음악가인 남자 주인공은 속이 좁고 재능이 얄팍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그녀가 쓴 ‘1848년 혁명의 역사’는 1848년 프랑스에서 일어나 전 유럽에 영향을 끼친 2월 혁명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의미 있는 저술로 인정받고 있다.
 
프레데릭 쇼팽. E.H. Schroeder 그림, 연대 미상, 베르겐 공공 도서관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

프레데릭 쇼팽. E.H. Schroeder 그림, 연대 미상, 베르겐 공공 도서관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

 
1836년 10월, 리스트는 쇼팽을 마리의 살롱에 초대했다. 상드는 첫눈에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리스트와 마리는 두 사람을 연결하려고 노력했다. 두 아이를 둔 유부녀와 6살 연하의 남자. 추문을 낳기 좋은 이 조건은 두 커플에게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 때문에 쇼팽과상드가 맺어지면 리스트-마리 커플에게 쏠리는 따가운 눈길이 분산될 수 있었다.
 
이후 마리-리스트 커플은 기복이 심한 마리의 성격처럼 변화가 심했다. 반면 한번 맺어진 쇼팽-상드의 관계는 무난하게 계속되었다. 마리의 감정 기복은 한때 절친한 친구였던상드와의 사이에도 벽을 만들었다. 특히 리스트와 관계가 악화하였을 때 그녀는 잘 유지되고 있는 쇼팽-상드 커플에게 질투를 느꼈다.
 
그래서 그들 커플에 대해 좋지 않은 얘기를 퍼뜨렸다. 이런 마리에게 영향받은 리스트도 한때 쇼팽과의 라이벌 의식을 지나치게 내세워, 그렇지 않아도 찜찜함이 있던 둘의 사이는 더 멀어졌다.
 
리스트가 맺어준 쇼팽·상드 커플
리스트는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쇼팽과의 화해를 시도했다. 뒤에 바르샤바에서 공연할 때 쇼팽의 부모를 방문해 따뜻한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이것은 쇼팽의 가족을 놀라게 했다. 쇼팽은 리스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몇 차례 가족에게 전했기 때문이다. 쇼팽과 리스트는 생전에 화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쇼팽의 음악을 진정으로 높이 평가했다. 쇼팽이 세상을 떠난 후 누구보다 먼저 쇼팽의 업적을 칭찬하는 전기를 썼다.
 
한편 리스트-마리 커플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상드는 쇼팽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없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마리아 보진스카(Maria Wodzinska, 1819~1896)라는 폴란드 유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상드보다 15살이 어린 소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마리아 보진스카를 만나기 전, 향수와 우수에 쉽게 빠졌던 쇼팽에 대한 이야기이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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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섭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필진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 한국인이 좋아하는 고전 음악가 쇼팽. 피아노 선율에 도시적 우수를 세련된 모습으로 담아낸 쇼팽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일생의 연인 상드와 다른 여러 주변 인물에 관련된 일화를 통해 낭만파시대의 여러 단면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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