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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수레 안에서 살던 필리핀 아이, 지금은

중앙일보 2019.05.29 08:00
[더,오래] 조희경의 행복 더하기(7)
“가난. 넌 도대체 어디까지 나를 몰아붙일 거니?”
최근 가난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게 만든 사진 한장이 있다. 나무판자와 천막이 아무렇게나 덧대어진 수레 안에서 낡은 살림살이 옆에 앉아 개와 밥을 나눠 먹는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 그리고 그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한 소녀.
 
사진 속 아이들은 한국컴패션 홍보대사로 활동 중인 개그우먼 이성미 씨가 재작년 필리핀 비전트립에서 만난 에리카와 그의 동생 매키다. 5명의 에리카 가족은 당시 한 평(3.3㎡)도 안 되는 작은 수레 안에 5명의 식구가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가정에선 둘째 딸 에리카만 컴패션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비전트립 일행이 그 집을 찾았을 때 에리카의 아빠와 오빠는 손님을 피해 일찌감치 집을 비운 상태였다.
 
개그우먼 이성미가 후원하는 필리핀 아이
개그우먼 이성미 씨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만난 에리카(사진 앞쪽)와 남동생 매키. 나무판을 얹은 좁은 수레가 남매와 개의 보금자리다. 개그우먼 이성미 씨는 비전트립에서 사진 속 이 아이들을 만났다. [사진 한국컴패션]

개그우먼 이성미 씨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만난 에리카(사진 앞쪽)와 남동생 매키. 나무판을 얹은 좁은 수레가 남매와 개의 보금자리다. 개그우먼 이성미 씨는 비전트립에서 사진 속 이 아이들을 만났다. [사진 한국컴패션]

 
비전트립 방문 이후 이성미 씨는 에리카의 동생 매키를 후원하기로 했다. 그는 “집이라고 할 수 없는 곳에서 밝게 웃는 아이를 보며, 수레 한편에서 플라스틱 통에 든 밥을 강아지와 나눠 먹는 남동생이 눈에 들어왔다”며 “어린 동생 매키의 눈에서 아무런 기쁨도 감정도 느낄 수 없어서, 매키에게도 누나처럼 환한 웃음을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2015년 월드뱅크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약 9억 명이 절대빈곤 기준인 하루 2200원(1.9달러)보다 적은 최소한의 생계비로 살아간다. 이보다는 조금 낫지만 언제든지 빈곤층이 될 수 있는 하루 3600원(3.1달러)의 생계비로 사는 인구도 20억 명이나 된다.
 
수많은 사람이 극심한 가난의 중력을 견디고 있거나 빈곤선 아래로 떨어질 위험에 놓여 있다. 빈곤은 대물림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어린이가 가난을 이겨 내려면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전 세계 5~14세 어린이 약 1억 5000만 명이 생계를 위해 노동 현장에 내몰리고 있다. 가난으로 인해 방치된 많은 어린이는 성적 학대를 포함한 신체적 학대를 받는다. 18세 미만 여자 어린이 1억 5000만 명이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에 시달린다고 한다. 성폭력에 우는 남자 어린이 수도 7300만 명에 달한다. 신체적 학대뿐 아니라 조롱, 위협, 협박, 차별, 거부 등 심리적 학대 역시 어린이의 마음에 심각한 상흔을 남긴다.
 
배워야 할 때 배우지 못하게 하는 빈곤, 예방이나 치료가 충분히 가능했을 질병으로 고통받는 삶, 사람들의 소외와 무시, 그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닫고 안으로 잔뜩 웅크린 상태. 이 모두 가난의 다양한 얼굴이다. 가장 안타까운 일은 어린아이들이 가난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꿈조차 꾸지 못하게 되는 무기력 상태다. 무기력은 영혼의 빈곤으로 이어져 결국 삶 자체를 빈곤하게 만들어버린다.
 
컴패션 비전트립팀이 지난해 방문한 에리카(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와 매키(네 번째) 가족의 새집. 다섯 식구가 부엌 한편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컴패션은 리키가 양육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자립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 수 있도록 했다. [사진 한국컴패션]

컴패션 비전트립팀이 지난해 방문한 에리카(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와 매키(네 번째) 가족의 새집. 다섯 식구가 부엌 한편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컴패션은 리키가 양육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자립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 수 있도록 했다. [사진 한국컴패션]

 
몇 해 전 탄자니아에서 만난 한 컴패션 졸업생은 가난을 ‘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정신적인 무능력 상태’라고 정의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온 가족이 음식을 구하는 데에만 매달려야 했기 때문에 생산적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작년 말 필리핀을 찾은 비전트립팀이 매키 가족의 새집을 사진에 담아왔다. 이번 사진에는 5명의 가족이 함께 있었다. 이성미 씨와 컴패션의 도움으로 이 가족은 방에 부엌이 달린 ‘집다운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1년 전 타지에서 온 손님을 피해 집을 비웠던 이들 아빠와 장남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줬다고 한다. 무엇보다 기쁜 소식은 막내 매키의 표정이 전보다 밝아졌다는 것이다. 기관의 전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우린 매키 가족의 사진을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기부자의 작은 나눔이 기적 일궈
누군가는 수많은 원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곳곳에 해결되지 않는 빈곤 문제에 대해 ‘도와서 뭐하냐’며 회의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변화의 산물은 생각보다 위대하다. 이성미라는 한 명의 후원자가 매키에게 전해준 것이 한 달에 4만 5000원씩 보내는 후원금만이 아닌 것처럼. 그는 물질적 가난 앞에 무력한 삶을 살아야 했던 한 가족에게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가능성을 선물했다.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의 저자인 사회학자 장 지글러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반 시민은 어떤 일을 할 수 있냐”는 질문에 “한 사람의 삶이 의미를 갖는 것을 믿는다”고 답했다. 나 역시 생명을 살리는 기적은 자신의 월급과 용돈에서 한 푼 두 푼 떼어 내놓는 기부자의 작은 나눔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조희경 한국컴패션 후원개발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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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경 조희경 한국컴패션 후원개발실장 필진

[조희경의 행복 더하기] 최고급 아파트를 팔던 18년 차 마케터에서 NGO 신입생으로, 남 도우러 왔다가 내 마음 수련 중이다. 직장이 아닌 인생에서 멋지게 은퇴하고 싶어 선택한 길. 돈과 지식보다 진심 어린 마음이 더 위대한 일을 해낸단 걸 배우고 있다. 더 오래 사랑하며 살고 싶은 중년 아줌마의 고군분투 NGO 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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