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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티서 울려 퍼진 “아리랑”…묘지를 옥토로 바꾼 고려인

중앙일보 2019.05.29 00:41 종합 18면 지면보기
지난달 16일 알마티에 사는 고려인들이 ‘아리랑’에 맞춰 율동을 하고 있다. [최경호 기자]

지난달 16일 알마티에 사는 고려인들이 ‘아리랑’에 맞춰 율동을 하고 있다. [최경호 기자]

지난달 16일(현지시각) 카자흐스탄 옛 수도인 알마티 내 ‘알마티 한국교육원’. 고려인 2~3세들로 구성된 ‘고향 합창단’이 ‘아리랑’을 부르고 있었다.  
 

문 대통령 지난달 카자흐스탄 방문
고려인 2~3세 서툰 한국어로 노래
“힘들 땐 아리랑 콧노래가 큰 위안”
전체 인구의 0.6%지만 영향력 탄탄

한쪽에선 한국어에 서툰 노인들이 고려인 2세인 블라디미르 일리치(68)씨의 지휘에 맞춰 연신 고개만 끄덕이는 모습도 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방문을 닷새 앞두고 진행된 연습에는 50여 명이 참여했다.
 
문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방문 소식에 당시 알마티에 사는 고려인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한국 대통령 최초로 알마티를 찾는 문 대통령에게 ‘아리랑’을 불러주기 위해서다.  
 
알마티는 1937년 한인 강제이주의 현장인 카자흐스탄 내에서도 가장 많은 고려인이 사는 곳이다. 고려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 일대로 이주한 한인들을 말한다. 스탈린 통치 시절에는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후 차별대우와 궁핍한 삶을 살았다.  
 
고려인 3세인 장니나(67·여)씨는 “타국에서 태어나 살다 보면 힘들다는 말조차 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며 “힘들 때 아리랑을 콧노래로 부르면 큰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카자흐스탄 내에서의 고려인들의 입지는 탄탄하다. 전체 인구(1840만명) 중 0.6%에 불과 하지만 고려인은 사회적 영향력으로 볼 때 카자흐스탄 내 130여개 민족 중 3~4대 민족 중 하나로 꼽힌다. 강제이주 이후 척박한 땅을 일궈가며 사회 곳곳에서 뿌리를 내린 결과다. 현재 카자흐스탄에는 고려인 10만6000여 명이 다양한 부문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카자흐스탄과 중국의 국경에 구축된 철도 시설. [최경호 기자]

카자흐스탄과 중국의 국경에 구축된 철도 시설. [최경호 기자]

알마티에 있는 고려극장은 카자흐스탄에서의 고려인들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한인 강제이주의 역사를 간직한 극장은 카자흐스탄 정부가 옛 ‘국립아카데미오케스트라’ 건물을 고려극장 측에 제공했다. 앞서 2002년 알마티 외곽에 있는 건물을 내줬던 정부 측은 시설이나 교통 편의성 등을 고려해 지난해 6월 다시 이전을 주선했다. 1932년 연해주에서 창단된 고려극장은 87년간 고려인들의 삶과 애환을 대변하는 역할을 해왔다.
 
카자흐스탄에는 고려극장 외에도 고려인 강제이주 첫 도착지인 ‘우슈토베’와 동포들의 공동묘지인 ‘바스토베’가 남아 있다. 우슈토베는 1937년 10월 9일 강제이주 당시 한인들이 열차를 타고 맨 처음 도착한 곳이다.
 
이주 초기 고려인들은 기차역에서 5㎞가량 떨어진 곳에 토굴을 짓고 추위와 굶주림에 떨어야 했다. 사막에 가까운 황무지에서 식량 한 톨 구할 수 없어 토굴 옆은 바로 공동묘지(바스토베)가 됐다. 고려인들은 이런 역경 속에서도 인근 강에서 물을 끌어다 쓰며 수백만평의 황무지를 농토로 바꿔놓았다. 우슈토베에서 척박한 땅을 일군 한인들은 이후 알마티나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이주해 중앙아시아 곳곳에 둥지를 틀었다.
 
크즐오르다에 있는 홍범도(1868~1943) 장군 묘지도 한인 이주의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홍 장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후 카자흐스탄에서 숨을 거뒀다. 옛 소련의 강제이주 당시 연해주에서 떠나온 장군은 말년을 고려극장의 문지기로 일하다 7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카자흐스탄

카자흐스탄

홍 장군의 발자취는 국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2동행복센터에 문을 연 역사유물기념관에는 홍 장군을 비롯한 고려인 항일투쟁의 역사유물들을 모아놓았다. 전시관에는 연해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김경천 장군의 부부 사진과 일기장인 ‘경천아일록’ 등 항일 자료 100여점이 전시 중이다.
 
이중에는 홍 장군의 손녀인 홍에까쩨리나(1925년생)씨가 1994년 유해봉환 요청을 한 자료도 포함돼 있다. 당시 홍씨는 “할아버지 유해를 한국으로 보내달라”며 카자흐스탄 내 크즐오르다 중앙묘역 관리소장에게 청원서를 보낸 바 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달 카자흐스탄 정상회담 당시 홍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는 문제를 논의해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낸 바 있다.
 
유럽 관문, 철의 실크로드 별명…‘황금인간의 땅’ 카자흐스탄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인 알마티 시내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선사시대의 황금인간. [최경호 기자]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인 알마티 시내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선사시대의 황금인간. [최경호 기자]

카자흐스탄은 1991년 소비에트연방(구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국가다. 세계에서 9번째로 큰 국토(272만4900㎢)에 석유와 가스, 광물자원 등이 풍부하다. 고대 실크로드(Silk Road) 중심지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토대로 독립 후 30여년 만에 중앙아시아 경제·물류 중심지로 도약했다. 지속적인 해외투자 유치와 2015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 대외 통상을 강화해온 결과다.
 
중국과 ‘신(新) 실크로드’ 정책을 편 후로는 중앙아시아 지역 중 투자 1순위 국가로 급부상했다. 철도를 이용해 중국의 물류를 유럽까지 실어나르는 핵심 관문이라는 점에서 ‘철(鐵)의 실크로드’로도 불린다. 한국은 1992년 외교관계를 수립한 후 섬유·기계·자동차 등 공산품을 수출해왔다. 지난해 한국 측의 총 투자액은 40억 달러로 중앙아시아 최대 투자대상국 중 하나다.
 
스탈린 시절 고려인들이 강제로 이주된 곳이라는 점에서 한국과의 역사적 연관성도 깊다. 고려인이 많이 거주하는 알마티는 이 나라의 옛 수도이며, 현 수도는 누르술탄이다. 지난 2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황금인간의 땅, 카자흐스탄’ 특별전에서는 카자흐스탄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역사가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다.
 
알마티(카자흐스탄)=최경호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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