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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의 어머니 곁에서 만화를 떠올린 까닭

중앙일보 2019.05.27 15:00
[더,오래] 김성희의 천일서화(38·끝)
어머니는 만화를 끔찍이 싫어하셨다. 어린 시절 만화에 빠져 한동안 갖은 사고를 쳤던 나 때문이다. 사진은 추억의 만화방에 모여 옛날 만화를 보고 있는 어린이들의 모습. [중앙포토]

어머니는 만화를 끔찍이 싫어하셨다. 어린 시절 만화에 빠져 한동안 갖은 사고를 쳤던 나 때문이다. 사진은 추억의 만화방에 모여 옛날 만화를 보고 있는 어린이들의 모습. [중앙포토]

 
어머니는 만화를 끔찍이 싫어하셨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예전에 신문에 연재하던 네 컷짜리 만화도 보지 않았다. 까닭이 있다. 내 탓이다. 국민학교 시절 만화에 빠져 한동안 갖은 사고를 쳤다. 지금 생각하면 ‘흑역사’다. 
 
중학교 입시가 엄존하던 때여서 6학년 때 과외를 했는데 과외에 간다 해놓고 만화방으로 내빼는 일도 잦았다. 그러면 어머닌 날 찾으러 혹은 잡으러 온 동네 만화방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제법 성적이 나오는 맏이라고, 적산가옥에 네 가구와 더불어 세 들어 사는 형편에 무리해서 과외를 시키는 부모 속도 모르고 그러는 자식 때문에 얼마나 열불이 났을까.
 
자기 자식이 누구보다 잘 났다고 여기는 게 부모 마음이라, 어머니는 종종 만화 타령을 했다. 내가 경기중학교에 떨어지고, 그리하여 인생이 꼬인 가장 큰 이유가 만화 탓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니 당신은 만화가 지긋지긋할 수밖에.
 
만화에 빠진 초등 시절의 ‘흑역사’
나는 만화를 좋아한다. 돌이켜보면 한글을 뗀 것도 만화 덕분이었고, 넉넉하지 않던 시절 만화는 거의 유일한 소일거리이자 상상력과 지식의 젖줄이었다. 지금도 나는 알량한 내 지식과 감성의 상당 부분을 만화에 빚지고 있다고 여긴다. 최경의 『동물전쟁』, 경인의 『삐빠』, 오명천의 『보리밥』, 박기정의 『가고파』, 산호의 『라이파이』에 임창, 김종래, 박부성, 박기당, 이종진, 유세종, 손의성 등등 쟁쟁한 이름들이 지금도 새록새록 기억난다.
 
지금도 여전히 만화를 좋아한다. 물론 굳이 찾아 읽을 정도는 아니지만 거부감을 느끼거나 낮춰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여기엔 『먼 나라 이웃나라』 『신의 물방울』 『식객』 『미생』 등 수준 높은 교양 만화가 쏟아진 것도 작용했다. 그래서 잘 고른다는 전제하에 만화도 유익하고, 재미있으며, 어엿한 예술의 장르이며, 아이들 전용도 아니고 만화에 빠진다 해서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한다. 
 
『답은 나에게 있어!』, 『있는 그대로 좋아』. 고이즈미 요시히로 지음.

『답은 나에게 있어!』, 『있는 그대로 좋아』. 고이즈미 요시히로 지음.

 
이런 소신(?)에 힘이 되는 책을 만났다. 『답은 나에게 있어!』 『있는 그대로 좋아!』(들녘)이다. 고이즈미 요시히로란 일본 만화가의 작품집으로 ‘부처와 돼지’란 시리즈의 1, 2권이다. 시리즈 명에서 짐작이 가겠지만 불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가르침을 전하는 네 컷짜리 만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
 
주인공은 모자라고 어설프다는 ‘덜돼지’. 한데 이 네 컷들이 제법 묵직하고, 곱씹어볼 메시지가 그득하다. 말하자면 모험이나 사랑 등의 ‘이야기’를 지어낸 극화(劇畫)도 아니고, 웃음을 자아내는 읽을거리가 아니라 생각하게 만드는 우화집이라 하겠다.
 
생각하게 만드는 우화집 ‘부처와 돼지’ 시리즈
첫째 컷-자신이 하는 일은(홀로 있는 덜돼지), 둘째 컷-상대에게는(웬 여자돼지가 스쳐 간다), 셋째 컷-스쳐 지나가는 일(스쳐 간 돼지의 뒷모습), 넷째 컷-‘후후후 첫눈에 내게 반했지’ 환호하는 덜돼지 곁에서 바퀴벌레가 “뭘 모르는 놈이군”이라 핀잔하는 가운데 ‘상대에게도 인생이 있어’란 코멘트가 떠 있다. 이건 ‘자기중심적인 돼지는 모른다’는 제목의 만화다. 돼지만 그럴까. 이 세상에 갑질하는 이들, 자기만 잘 나고,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람 비슷한 돼지들이 숱하지 않은가.
 
‘흰색이라는 것을 안 것은’, ‘사실은 흰색이 아닌 다른 많은 색들과 비교해서’, ‘흰색이라고 알게 된 것이다’, ‘세상에 흰색만 있었다면 흰색이라는 말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단순히 만화라고만 할 수 있을까.
 
2권은 더 깊다.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은 혼자 존재할 수 없다’, ‘ 인생은 사람의 의지를 넘어선다’, ‘욕망에 눈이 멀지 않으면 마음은 가라앉는다’, 이건 ‘알아두어야 할 네 개의 당연함’이란다. ‘꽃이 피면 반드시 진다. 또한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어제는 이미 죽은 시간. 내일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간. 살아 있는 시간은 바로 지금.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어?’, 이런 구절들도 만날 수 있다.
 
아흔두 살 어머니는 요양원에 계신다. 꼭 두 달째다. 갑자기 상태가 안 좋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허둥지둥 요양원에 갔다. 한마디 못하는 어머니 곁에서 ‘부처와 돼지’를 떠올렸다. 어쩐지 안심이 됐다. 어머니도 이런 만화와 ‘화해’했으면 삶이 좀 더 편안해졌을 거란 생각과 함께.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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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필진

[김성희의 천일서화] 책생책사(冊生冊死). 책을 읽고 기자를 꿈꿨고, 출판팀장으로 기자 생활을 마무리했다.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핵심은 ‘재미’였다. 공연히 무게 잡는 책은 싫기도 하고 읽어낼 깜냥도 못 되었으니.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재미있는 책’ 이야기 또는 재미있는 ‘책 이야기’를 쓰려 한다. 실타래가 풀려나가는 듯한 아라비안나이트식 책 이야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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