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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현철의 시선] 질병이 된 ‘게임 중독’, 앞으로가 문제다

중앙일보 2019.05.27 00:04 종합 29면 지면보기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대학 시절 학교에서 하는 반나절 짜리 예비군훈련을 빼먹어 일주일 동원훈련을 간 적이 있다. 몰라서 그랬던 게 아니라 게임 때문이었다. 개인용 컴퓨터(PC)가 막 보급되던 그때 거금을 들여 286 AT 한 대를 자취방에 들여놨다. 처음에는 그 PC가 타자기 대용으로 쓰였다. 아직 상업용으로 팔리지 않던 아래아 한글 같은 프로그램을 써서 리포트를 만들고 제출하는 게 신기했다.
 

WHO서 만장일치 공식 분류
게임업계·문체부는 울상
과잉대응 않는 정부 대응 필요

하지만 곧 게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접하게 됐고, 곧바로 빠져들었다. 밥을 거르고, 학교를 안 가고,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 그날도 그랬다. 전날부터 시작한 게임이 이상하게 맘대로 풀리지 않았다. ‘일찍 자야지’라는 각오는 금세 허물어졌다. 어둠이 걷히고 학교에 갈 시간이 다가왔지만 ‘한 번만 더’라는 유혹이 자판에서 손을 떼기 어렵게 했다. 이후엔 그런 일이 없었지만 ‘게임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느끼기엔 충분한 계기였다.
 
게임은 재미있다. 원래 그러라고 만든 것이다. 특히 내게 잘 맞는다고 느껴지는 게임을 만나면 금세 빠져들게 된다. 많은 이들이 똑같이 느끼면 1997년 외환위기 무렵 사회를 휩쓸었던 ‘스타크래프트 열풍’ 같은 것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대가도 있다. 게임은 시간과 지적 능력을 소모한다. 적당히 즐기면 몰라도 과도하게 빠지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준다.
 
누구나 한 번쯤 게임을 하다 밤을 새우거나 점심시간 식사 대신 PC방으로 달려간 경험이 있을 것이다. 중고생 자녀를 둔 부모들은 ‘남자는 롤(온라인 게임의 일종)로 망하고, 여자는 덕질(연예인을 좋아하는 것)로 망한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게임 몰입이 심해지면 당연히 대인관계나 사회활동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한다. 이런 게 며칠이나 한두 달이 아니라 오랫동안 계속된다면? 가족이나 주변에서 ‘쟤는 게임중독이야’라고 수군대는 소리를 분명히 듣게 될 것이다.
 
게임중독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것도 꽤 오래됐다. 1990년대 문제가 제기돼 2000년대 본격화됐다. 게임을 하다가 심각한 폭행사건이 벌어지고 ‘아이템’을 얻으려 과도한 금전과 대가를 주고받는 건 다반사다. 게임을 하다가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이를 숨지게 했다는 끔찍한 뉴스까지 나왔다. 많은 사람이 게임을 즐기게 된 만큼 그 사회적 후유증도 적지 않다는 얘기다.
 
25일 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 이용 장애(게임중독)’을 질병으로 공식 분류키로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ICD)의 하위 항목에 게임중독을 포함하는 걸 해당 위원회가 만장일치로 의결했다고 한다. 2022년부터 회원국에 적용되지만 한국의 표준질병 사인분류(KCD)에 적용되는 건 빨라야 2025년부터라고 한다.
 
WHO의 이번 결정으로 난감해진 건 한국 게임업계와 이를 대변해온 문화체육관광부다. 이들은 그동안 ‘게임중독’이 의학적·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며 ‘게임 과몰입’이라는 용어를 쓰는 등 이번 결정에 반대해왔다. 게임중독은 현상일 뿐 그 배경에 있는 개인적·사회적 원인들을 봐야한다는 것이다. 게임중독이 질병으로 인정되면 게임산업이 3년간 11조원 위축되고 게임업계 종사자가 15% 줄어들 것이라고도 주장해왔다. ‘게임중독세’가 신설될 것이라는 둥 가짜뉴스도 업계에 돌았다. 게임중독을 한번 인정하면 곧장 업계의 부담과 산업 위축으로 이어질 것처럼 얘기했다. 과거 ‘셧다운 제도’ 도입의 악몽을 떠올리며 여론 총력전을 편 것 같다.
 
하지만 WHO의 결정은 그런 게 아니다. 알코올 중독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일반 국민이나 WHO로부터 명백한 질병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 원인인 술에 대한 직접적 규제는 거의 없다. 일부 주취자나 음주 운전자가 문제지 알코올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어서다.
 
게임도 그렇다. 적당히 즐기면 삶의 활력소지만 과하게 하다가 중독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이런 사람을 가려내 일상이 파괴되지 않도록 이끄는 것은 공동체와 국가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임무다. WHO의 결정에 따라 앞으로 게임 중독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한 논란이 벌어질 것이다. 실태조사도 있을 것이다. 게임업계가 제대로 나서야 할 건 그때다. 이미 끝난 게임중독 논란을 거듭 불러내기보다는 게임중독의 정확한 현실이 어떤지, 이를 줄이기 위한 사회적 비용을 어떻게 감당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야 한다. 게임중독세 등 과잉대응으로 치닫는 것을 자제하는 정부의 성숙한 모습도 물론 필요하다.
 
나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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