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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대통령 통화 유출되면 어느 나라가 상대하겠나

중앙일보 2019.05.27 00:06 종합 30면 지면보기
한·미 정상 간 통화 내용 유출은 경위가 어떻든 간에 잘못된 일이다. 3급 국가기밀인 정상 간 통화 내용을 까발릴 경우 생기는 국가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외교 기밀을 줄줄 흘리는 국가를 어느 나라가 믿고 깊숙한 이야기를 하려 하겠는가.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의 폭로에 대해 보수 성향의 전 고위 외교관과 같은 당 의원마저 “국익을 해치는 행위”라고 비판한 사실을 강 의원과 한국당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유한국당 측은 강 의원의 폭로를 놓고 “정권의 굴욕 외교와 국민 선동의 실체를 일깨워 준 공익 제보 성격”이라고 감싸지만 이는 자기 편의주의적 해석이다.
 

공직기강 해이 바로잡을 계기 삼아야
‘같은 통화, 다른 내용’ 악습 근절 필요

통화 내용을 알려준 장본인이 누구보다 외교 기밀의 중요성을 잘 아는 베테랑 외교관이란 점도 어이가 없다. 청렴과 비밀 엄수 등 공직사회의 기강은 가을 서릿발처럼 엄중해야 한다. 문제의 외교관이 강 의원과의 개인적 학연을 이유로 기밀을 빼돌려 전달했다면 매우 심각한 사안이다. 최근 일어난 공직사회, 특히 외교부의 기강해이 사건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구겨진 태극기’ ‘갑질 대사’ 등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꼬리를 물었다. 이 참에 무너진 기강을 반드시 다잡아야 할 것이다.
 
정치인들이 알 권리 등 온갖 구실을 대며 국가기밀의 중요성을 무시해 온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 악습을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야당이 제기한 정청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기밀유출 의혹도 짚어 봐야 한다. 정 전 의원은 지난해 종편에 출연해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통화한 것을 로데이터(raw data·원자료)로 다 받아 봤다”며 “녹음이 아닌 녹취”라고 말했었다. 이제 논란이 되자 그는 청와대 자료를 토대로 한 것이라고 둘러대지만 통화 내용을 빼돌렸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이번 사태에 대한 청와대의 대응도 개운하지 않다. “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의 방일 직후인 5월말 한국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강 의원의 주장이 나오자 청와대는 전면 부인했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보도된 내용 중 방한 형식, 내용, 기간 등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청와대는 외교기밀 유출을 문제 삼아 제보자 색출에 나섰다. 기밀 유출은 맞지만 내용은 틀리다는 건 석연치 않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정부가 과연 진실을 말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정상 간 회담이나 통화 내용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발표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 문재인 정부 들어 ‘같은 통화, 다른 내용’ 현상은 심해졌다. 한·미 정상은 북핵 문제와 관련된 주요 고비마다 전화로 의견을 조율해 통화 횟수가 21번에 이른다. 하지만 통화 후 양국 발표 내용을 보면 같은 대화에 대한 설명이 맞는지 의심할 정도다. 청와대는 주로 “북한과의 대화에 노력하는 문 대통령의 입장을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했다”는 내용이었다. 반면에 백악관은 “단호한 제재 압박을 계속하기로 양국이 합의했다”는 식이다. 불법 여부를 떠나 강 의원의 발표에 솔깃해지는 것도 이런 석연치 않은 대목 때문이다. 한·미 간 소통과 관련된 불필요한 불신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이런 희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당국은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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