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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아날로그의 귀환? 밀레니얼·Z세대의 신문물로 각광

중앙일보 2019.05.26 00:03
LP 생산, 종이 잡지 발행 늘어… 디지털 수익모델과 결합하거나 아이돌 굿즈 취급
 
성수동에 위치한 마장뮤직앤픽쳐스 LP 레코드 공장.

성수동에 위치한 마장뮤직앤픽쳐스 LP 레코드 공장.


 #1. 4월 18일 오후 서울 성수동의 마장뮤직앤픽처스 LP(Long Play) 레코드 공장에선 프레스 기계가 검은색 플라스틱 덩어리 180g을 천천히 압축해 옥수사진관의 1집 LP 레코드 복각판을 찍어내고 있었다. 옥수사진관은 올해 4집을 내는 3인조 밴드다. 이들은 공연장에서 1~4집 LP 음반을 판매할 예정이다. 주문 물량은 각 500장씩이다. 500장을 찍는 데 약 2주가 걸린다. 이 공장은 공식적으로는 2004년, 실질적으로 1990년대 후반 국내에서 CD에 밀려 생산이 중단된 이후 근 20년 만인 2017년부터 다시 LP를 생산하고 있다.
 
#2. 같은 날 오후 성수역 근처의 한 지식산업센터 건물 5층에 있는 주거 전문 미디어 스타트업 브리크 컴퍼니 사무실은 조용했다. 에디터들이 취재·출장으로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종이 잡지인 매거진브리크를 격월로 발행하고, 단행본인 디자인북도 낸 이 회사는 4월 25일 연결형 온라인 미디어를 표방하는 새로운 웹사이트 론칭을 앞두고 있었다. 광고 하나 없는 큰 판형의 종이 잡지 가격은 1만9600원. 지금까지 종이 잡지로 수익을 내진 못 했지만, 브리크 컴퍼니는 현재 5권까지 나온 이 잡지를 계속 발행할 예정이다.
 
 
#3. 4월 12일 오후 6시 찾아간 마포구 합정동의 한 2층 단독주택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았다. 담은 허물어 없앴지만 1980년대에 지어진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원목으로 고급스러운 문을 만들었고, 정원 곳곳에 눈에 띄지 않게 멋을 낸 흔적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1층 거실 소파에서 얘기를 나누던 4~5명의 20~30대 남녀들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정면에는 호텔 로비를 연상케 하는 안내를 하는 컨시어지 프론트가 있었다. 안내를 받아 출입구 우측에 있는 15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바에서 잠시 대기를 했다. 이곳은 지난해 4월 문을 연 회원제 사교클럽이다.
 
 
디지털 전환 시대의 수익모델로 무장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취향관 외관.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취향관 외관.

디지털 전성 시대이지만 아날로그 감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 시장조사업체 닐슨의 지난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전체 음악 앨범 판매 중에서 LP 레코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12%에 이르렀다. 2006년 90만장이 팔린 LP는 지난해 1680만 장이 팔렸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잡지산업 매출액 조사에 따르면 잡지사 숫자는 2012년 1479개에서 2014년 2500곳으로 오히려 늘었다. 2017년에도 여전히 2021개 잡지가 만들어지고 있다(다만 2012년 1조8625억원이던 전체 잡지산업 매출은 2014년 1조3753억, 2017년에는 1조353억원으로 크게 떨어졌다). 기업화된 오프라인 커뮤니티도 독서, 자기계발, 취미, 외국어 등 분야에서 늘어나고 있다.
 
종이·LP·사교와 같은 아날로그 감성에 빠진 주요 소비자는 의외로 20~30대인 밀레니얼·Z세대다. LP를 제대로 접해보지 못했던 이들이 턴테이블을 사고, 디지털 콘텐트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만드는 독립 잡지도 늘어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소셜미디어, 메신저 서비스로 소통하던 데서 벗어나 직접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취향을 공유하는 것이다.
 
 
2030 세대의 아날로그 사랑은 우리만의 일이 아니다. 워싱턴포스트는 4월 21일 미국의 대표적인 명문대인 예일대 학생들의 집단 움직임을 자세히 보도했다. 예일대 학생들은 도서관의 종이책을 지키기 위해서 단합하고 있다. 지난 1월 이 학교 도서관장은 늘어나는 학생 수를 고려해 현재 지하 서고에서 보관중인 15만권의 종이책 수를 4만권으로 줄여 공간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학생들은 분노했다. 일부는 도서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줄어드는 데 우려를 표했지만, 어느 학생은 웹이나 하이퍼링크가 작동하는 것과는 달리 도서관 아무 책장에나 가서 집어 드는 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에 초점을 두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10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브라우즈-인’ 운동에 가세했다”며 “한 학생은 페이스북에서 친구들에게 ‘레지스탕스에 참여하라’고 권유했다”고 보도했다.
 
 
4월 18일 만난 하종욱 마장뮤직앤픽쳐스 대표는 “LP 레코드에 바늘을 올려놓고 잠시 기다렸다가 음악을 듣는 것이 처음으로 LP를 접하는 젊은 세대에게 경건한 의식과 같을 수 있다”며 그동안 LP를 꾸준히 지켜온 애호가들을 레지스탕스에 비유하기도 했다. 디지털 네이티브인 젊은 세대의 아날로그 소비의 이유에 대해 데이비드 색스는 [아날로그의 반격]에서 “젊을수록, 디지털에 더 많이 노출된 세대일수록 디지털 기술에 매력을 덜 느꼈고, 그것이 가져올 영향을 더 우려했다”고 설명했다.
 
 
아날로그의 귀환이 이뤄지고 있긴 하지만 과거와 똑같은 모습은 아니다. 오프라인 커뮤니티에는 디지털 경제의 비즈니스 모델이 접목되기도 한다. 유튜브 채널 ‘영국남자’의 파트너사이기도 한 킷스튜디오 소속의 박영훈 취향관 공동 대표는 “취향관은 오프라인 버전의 구독경제”라고 주장했다. 구독경제는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유료 미디어, 소프트웨어 사용 등 한 번의 구매로 제품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일정 사용료를 반복해서 내게 하는 디지털 전환 시대의 수익모델이다. 미국에서는 최근 10년간 LP를 바이닐(Vinyl)로 부르고 있다. 바이닐은 LP 레코드의 재료에서 따온 말이다. 하종욱 마장뮤직앤픽처스 대표는 “LP가 단순히 복고 유행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음악산업에서 하나의 섹터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해외와 달리 국내에서 팔리는 LP 수는 쇼핑몰 단위가 아니라면 전체 집계가 어려울 만큼 영세한 수준이다. 마장뮤직 앤픽처스는 2018년 LP 부문 매출이 전년 대비 160% 정도 성장했다고 밝혔다.
 
브리크 컴퍼니의 수익모델의 핵심은 기존 오프라인 잡지의 광고나 구독료 모델이 아니다. 정지연 대표는 종이 잡지의 감성을 주요 취재원이자 수익모델의 핵심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건축가들과 공유하려는 것도 큰 이유라고 말했다. 건축가들은 건축물의 스케치를 하는 데 종이와 펜을 여전히 사용한다. 정 대표는 “잡지는 오브제나 굿즈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굿즈(Goods)는 아이돌·애니메이션·스타벅스처럼 팬덤이 강한 분야의 브랜드를 활용해 만든 기념품으로 해당 팬덤 내에서 주로 유통된다.
 
 
한정연 기자 han.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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