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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치료해준 의사와 애정 도피…상드의 화려한 남성편력

중앙일보 2019.05.24 12:00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25)
29세의 조르주 상드. 프랑스 낭만파의 대표적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와의 관계는 상드의 연애역사에서 가장 시끄러웠다. Alfred de Musset, 1833, Bibliotheque de l'Institut de France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29세의 조르주 상드. 프랑스 낭만파의 대표적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와의 관계는 상드의 연애역사에서 가장 시끄러웠다. Alfred de Musset, 1833, Bibliotheque de l'Institut de France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조르주 상드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여자들과 오래 함께 있는 게 힘들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여성스러운 것, 교태부리는 것, 새침 데는 것 등은 그녀의 본성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남자와 있는 것이 편했다. 이미 언급된 적이 있듯이 상드에게 있어서 육체적 결합은 정신적 사랑과 결합하였을 때 ‘최고의 형태로 성스럽고 순수하며 또한 헌신적인 것’이었다. (본 시리즈 14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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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드는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꽉 막힌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남편은 상드의 권유로 책을 들기도 했지만 몇 줄 읽다가 금방 눈이 감겼고 책은 손에서 떨어졌다. 문학, 시, 윤리학, 뭐든지 상드가 얘기할 때 그는 책의 저자를 알지 못했고 상드의 생각을 어리석다며 물리쳤다.
 
상드는 말이 통하는 친구를 찾았다. 그즈음 알게 된 지방 판사 오렐리앙 드 세즈와는 편지로 속에 품은 열정을 쏟아낼 수 있어서 좋았다. 한때 상드는 그에게 거의 매일 편지를 보냈다.
 
1827년 가을부터 상드는 그 지방의 친구, 스테판 아자송 드 그랑샤뉴(Stéphane Ajasson de Grandsagne, 1802~1845)와 어울렸다. 그해 겨울 파리에서 휴가를 그와 같이 보낸 상드는 9개월 후 딸 솔랑주를 낳았다. 1831년 그녀가 파리에 올라와서 자유로워지고 거기에 더하여 명성과 경제적 여유를 얻자 다방면의 인사들과 교류의 폭은 넓어졌고 마음이 통하는 남자들과의 만남도 많아졌다.
 
파리에 와서 동거했던 첫 남자 쥘 상도는 상드가 작가로 입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게으른 데다가 상드가 없는 틈을 타서 다른 여자를 집에 끌어들였다. 둘은 헤어졌다. 쥘 상도는 상드에게 버림받고 ‘눈물’을 흘렸고 자살까지 생각했다. 그가 유명한 작가 발자크(Honoré de Balzac)에게 가서 자신의 절망을 얘기하자 발자크는 쥘을 비서로 옆에 두고 보살폈다.
 
쥘 상도와 헤어지고 상드는 ‘카르멘’의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érimée)와 짧게 사귀었다.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다가 가까워졌는데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상드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솔직한 상드는 가깝게 지내던 여배우 도르발에게 그것에 대해 소상히 얘기했고 도르발은 다시 친구였던 소설가 알렉산드르 뒤마(Alexandre Dumas)에게 이 말을 옮겼다. 뒤마가 그의 친구들에게 그 얘기를 전해서 결국 온 파리가 유명작가 상드와 메리메의 애정행각을 알게 되었다. 메리메는 상드에게 버림받고 그녀를 따라다니며 뒤에서 ‘눈물’을 흘렸다.
 
상드의 연애사건 중 가장 시끄러웠던 것은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뮈세(Alfred de Mussset, 1810~1857)와의 연애사건이었다. 열정과 광기에 휩싸인 둘의 만남은 파리 문단에 화제를 뿌렸다. 두 사람은 1833년 한 유명잡지 편집자가 마련한 회식자리에서 만났다. 뮈세는 유일한 여성 참석자였던 상드와 나란히 앉게 되었다.
 
알프레드 드 뮈세. 프랑스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인 그는 상드와 광적인 사랑에 빠졌다. Charles Landelle, 베르사유 궁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알프레드 드 뮈세. 프랑스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인 그는 상드와 광적인 사랑에 빠졌다. Charles Landelle, 베르사유 궁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둘은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고 금방 서로 통하는 바가 있음을 알았다. 두 아이의 엄마와 6살 연하의 시인은 편지를 교환하다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뮈세는 상드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그해 말 둘은 가족과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났다. 베네치아는 그 둘의 낭만적 꿈을 실현해 줄 낙원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상드는 여독에 따른 병으로 눕게 되었다. 뮈세는 연인의 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네치아에서 밤의 환락에 빠졌다. 건강을 회복한 상드는 약속한 원고도 써야 했고 뮈세의 무절제한 생활에 경고도 줄 겸 문을 걸고 나오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뮈세가 심한 고열에 정신착란을 동반한 병을 앓게 되었다.
 
그동안 상드를 치료했던 젊은 의사 파젤로는 이제 상드와 함께 뮈세를 돌보게 되었다. 뮈세는 거의 한 달이 지나서야 위독한 상태를 벗어났다. 그가 깨어나서 보니 상드와 파젤로는 연인이 되어있었다. 화가 난 뮈세는 홀로 파리로 돌아갔고 병을 앓고 있는 연인 옆에서 어떻게 바람을 피울 수 있느냐고 상드를 탓하고 돌아다녔다.
 
상드는 파젤로와 몇 달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파젤로와 함께 파리로 돌아온 상드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그를 홀로 두고 자신에게 몰리는 비난의 눈길을 면하려 했다. 그녀는 파젤로와 사랑에 빠진 것은 뮈세가 이탈리아를 떠난 뒤라고, 그리고 뮈세는 환각에 빠져 헛것을 본 것이라고 해명했다. 뮈세는 상드에게 ‘눈물’로 애걸하며 다시 돌아와 달라고 매달렸다. 뮈세의 열정적인 편지 공세에 두 사람은 다시 연인관계를 회복한다.
 
홀로 지내던 파젤로는 질투에 ‘눈물’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결국은 이탈리아로 돌아가는데 파리를 떠나기 직전에 뮈세의 친구에게 상드와의 관계가 시작된 것은 뮈세가 병상에 있을 때라고 털어놓았다. 그 친구는 즉각 뮈세에게 이것을 전했지만 뮈세는 이미 상드에게 빠져있었다.
 
개성이 강한 상드와 뮈세는 재결합한 후에도 불화만 되풀이했고 얼마 후 뮈세가 파국을 선언하고 떠났다. 창백하게 여의어가던 상드가 자신의 머리카락과 일기를 뮈세에게 보내어 사랑을 호소했다. 일기를 읽고 ‘눈물’을 터뜨린 뮈세는 상드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원만할 수 없었다. 한 달도 되지 않아 뮈세는 상드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칼로 상드를 위협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상드와 뮈세는 1835년 3월 6일 헤어졌고 2년여에 걸친 두 사람의 막장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상드와의 만남은 뮈세를 성숙시켰고 그의 문학적 재능을 더 풍부하게 했지만 그의 개인적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뮈세는 술, 도박,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망쳤다. 뮈세는 상드를 잊지 못했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 상드가 떠났는지 주위에 묻고 다녔다. 그는 상드처럼 깊은 눈을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남장한 조르주 상드. 알프레드 뮈세와 헤어진 상드는 막 머리카락을 잘랐다. 얼굴에는 슬픔이 있다. 상드와 들라크루아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만나서 오랜 친구가 되었다. Delacroix, 1834. 국립 외젠 들라크로와 미술관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남장한 조르주 상드. 알프레드 뮈세와 헤어진 상드는 막 머리카락을 잘랐다. 얼굴에는 슬픔이 있다. 상드와 들라크루아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만나서 오랜 친구가 되었다. Delacroix, 1834. 국립 외젠 들라크로와 미술관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상드와 뮈세는 함께 있는 기간에는 환락, 환각, 불화, 다툼이 있었고 떨어져 있는 동안에는 열정 가득한 편지와 눈물을 남겼다. 상드는 뒤에 뮈세와의 시간은 악몽과 같았다고 고백했다. 뮈세와 헤어진 후 그녀는 영혼이 통하는 사랑은 결국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떠들썩했던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워낙 말들이 많았는데 상드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편지를 위조하기까지 했다.
 
둘 사이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출간되었다. 뮈세는 둘의 관계를 소재로 한 ‘세기(世紀)의 아이의 고백’을 남겼고 뮈세가 세상을 떠난 후 상드는 “그녀와 그”라는 책에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자기의 입장에서 서술했다. 상드의 책이 나오자 뮈세의 동생 폴은 “그와 그녀”라는 책을, 뮈세의 연인이었던 콜레는 “그”라는 책을 출간해서 뮈세를 변호하였다.
 
뮈세와의 관계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쯤 상드는 유명한 달변의 변호사 미셸 드 부르즈(Michel de Bourges, 1797~1853)를 소개받았다. 그는 상드의 소설을 읽었고 그녀를 알고 있었다. 상드는 남편 뒤드방 남작과 이혼하는 데 미셸의 도움을 받았다. 상드와 남편 뒤드방의 관계는 1836년 비로소 정리되었다.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되어있던 당시에 여성이 주도해서 소송을 통해 이혼을 얻어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상드는 이제 노앙의 저택과 토지에 대해서 자신이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거기서 나오는 돈도 남편에게 구걸할 필요 없이 자신이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었고 뒤드방은 노앙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소송 기간 중 상드는 가정이 있던 미셸 드 부르주에게 빠졌다. 뮈세와의 만남에서 진이 빠진 상드였다. 화려한 언변의 미셸은 상드의 눈을 바라보며 새로운 이상과 목표를 제시했다. 정치권에서도 영향력이 있던 카리스마 있는 남자 미셸은 상드를 휘어잡았다. 상드의 열정이 다시 살아났다. 적극적인 사회주의자였던 그의 영향으로 그렇지 않아도 공화주의자였던 상드는 더 진보적으로 바뀌었다.
 
미셸 드 부르주. H Brunet.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미셸 드 부르주. H Brunet.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하지만 미셸은 부유한 자신의 아내를 버릴 수 없었다. 상드는 그를 기다리며 여러 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난 오직 당신 앞에서만 약한 존재이고 당신에게만 헌신적이다’라고 호소했다. 기다림, 갈망, 희망, 마음 졸임의 6개월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상드는 고통을 받았다.
 
미셸 부르주의 상드에 대한 열정이 식었을 때 상드는 잘 생긴 작가 샤를 디디에(Charles Didier, 1805~1864)와 약 2달간 동거했다. 디디에는 상드를 존경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재미로 자신을 만나는지 아니면 정말 사랑하는 건지 궁금해했다. 거의 동시에 상드는 미남 배우 보카주와도 사귀었었다.
 
쇼팽을 만날 때는 자기 아이들 가정교사이면서 극작가였던 말피유와 연인관계였다. 상드를 좋아했던 남자들은 대부분 그녀에게 깊이 빠져들었고 그녀가 떠나자 큰 상실감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상드에게는 특별한 마력이 있었다.
 
다채롭고 어지러운 그녀의 연애 파고(波高)는 쇼팽을 만나고 나서 가라앉는다. 둘은 9년간 같이 지냈다. 쇼팽의 무엇이 폭풍우 같은 그녀의 변덕스러운 애정을 잠재우고, 그 긴 시간 동안 동행할 수 있게 했을까? 물론 그녀의 남성편력은 쇼팽과 헤어지고 나서 다시 이어진다. 한편 1835년 초에는 상드가 리스트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쇼팽과 상드를 이어준 사람은 리스트와 마리 다구였다. 파리 사교계의 두 스타, 리스트와 마리 다구의 스캔들과 그들이 쇼팽과 상드 커플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 편에 이어진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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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섭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필진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 한국인이 좋아하는 고전 음악가 쇼팽. 피아노 선율에 도시적 우수를 세련된 모습으로 담아낸 쇼팽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일생의 연인 상드와 다른 여러 주변 인물에 관련된 일화를 통해 낭만파시대의 여러 단면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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