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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진실의 순간, 세금

중앙일보 2019.05.24 00:23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가정경제를 이해하는 여성이라면 국가경제 문제를 더 잘 이해할 것이다.” 영국의 만성적 재정 적자와 싸웠던 마거릿 대처 전 총리는 반대 세력에 이렇게 면박을 주곤 했다. 빚은 무조건 나쁘다는 걸 주부들은 아는데 당신들은 왜 모르느냐는 투였다. 가정과 국가의 직관적 비유는 이후 여러 나라에서 국가 재정을 바라보는 강력한 틀이 됐다. 그런데 최근 이런 메타포에 태클을 거는 이론이 미국 좌파 진영 사이에서 득세하고 있다. 이른바 ‘현대통화이론’(MMT·Modern Monetary Theory)이다.
 

적극적인 재정 역할 주문했지만
결국 맞닥뜨려야 할 문제는 증세
국민에 고통분담 설득할 수 있나

이론의 핵심은 이렇다. “국가는 통화 발행권이 있기 때문에 가계와는 달리 파산할 염려가 없다. 자국 통화로 돈을 빌릴 수 있는 국가는 과도한 인플레이션 걱정만 없다면 경기 부양을 위해 화폐를 마음껏 찍어내도 괜찮다.” 근거는 미국과 일본 경제다. 두 나라의 국가 부채는 각각 GDP의 1.1배, 2.4배(2017년 기준)다. 일반 가정이라면 일찌감치 재산 압류 집행관이 들이닥쳤을 수준인데도, 초인플레이션이나 금리 급등 없이 경제는 순항하고 있다. 이론의 함의는 적극적 재정 운용 주문이다. “빚 걱정 너무 하지 말고, 필요하면 돈 찍어 쓸 데 쓰라.” 미국 좌파의 떠오르는 신예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하원의원은 이 돈을 재생 에너지에 투자하는 ‘그린 뉴딜’을 제안하고 있다.
 
MMT에 대한 관심이 국내 재정 확대론자 사이에서도 슬슬 높아지는 분위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이론은 우리한텐 ‘그림의 떡’이다. 기축 통화국도 아닐 뿐만 아니라 대외 의존도까지 높은 우리 경제에는 재앙이 될 가능성이 크다. 재정적자 확대→원화가치 하락→환율 및 물가 불안이라는 경로를 피해가기 어렵다. 미국과 일본 주류 이코노미스트 사이에서도 MMT는 ‘위험한 이단’ 쯤으로 취급받고 있다. 하지만 모른다. 어느 순간 족보까지 따지며 등장한 소득주도성장론처럼 우리 사회 담론이 될지.
 
재정확대론이 맞닥뜨려야 할 진실의 순간은 결국 세금 문제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채무 비율 40%의 근거가 뭐냐”고 물었지만, 그 답을 구하기 전 먼저 자문(自問)했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부와 여권에서는 이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안 보인다. 야당 시절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하냐”며 줄기차게 공격하던 결기는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골치 아픈 숙제는 ‘일단 미루고 보자’다. 신용카드 소득공제 축소는 봉급 생활자의 반발 때문에 없던 일로 돌렸다. 수년간 논의해온 주세 개편마저 ‘서민 술’ 소줏값 인상 여파가 걱정되자 발표 직전 덮었다. 적폐 청산을 위한 가장 큰 동력이 지지율인데, 스스로 이를 깎아 먹는 일을 하겠느냐는 의심이 나온다.
 
여당 일각에서 목소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엉거주춤한 자세다. 세금을 올리자니 지지율이 걱정되고, 그냥 있자니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따가울 터다. 경제라도 좋으면 별걱정 없으련만, 성장률 전망은 하향 일변도다. 선택한 해법은 결국 부자 증세다. 이명박 정부 때 낮췄던 대기업의 법인세 부담을 다시 높이자거나, 고소득자에 대한 세금을 더 걷자는 주장이다. 40% 이상인 면세 근로자에게 단 한 푼이라도 세금을 내게 하자는 이른바 ‘보편 증세’는 입도 뻥긋 못하고 있다.
 
“국민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저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1993년 2월 빌 클린턴은 대통령 취임 첫 TV 연설에서 재정적자 해소를 위한 경제 개혁과 증세 필요성을 역설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때 닦은 재정 흑자 기반이 유례없는 경제 호황으로 이어졌고, 본인에게는 섹스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고의 퇴임 지지율을 기록한 힘이 됐다. 장밋빛 비전만 제시하고 이를 이루기 위한 비용이나 고통을 이야기 않는다면 둘 중 하나이기 쉽다. 비전이 무리하거나, 용기가 없거나. 자신이 없다면 목표부터 다시 따져 보는 게 좋다.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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