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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아내·하녀가 차례로…미스 마플이 찾은 연쇄살인범은?

중앙일보 2019.05.23 10:00
[더,오래] 이광현의 영어추리소설 문학관(5)
마더구스(Mother Goose)는 영국 등지에서 17세기부터 유행한 동화(fairy tales) 양식, 또는 그 동화집의 수집가 혹은 저자를 일컫는 용어이지만 통상 너서리 라임(nursery rhyme: 아이들을 위한 시나 노래)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한편 상당수의 마더구스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기보다는 쓰일 당시 사회의 상황이나 부조리를 부정적이며 잔인하게 묘사한 것이 많아서 어린이들에게 이를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도 벌어지고 있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미취학 아동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마더구스를 부르게 하는 일도 흔히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여러 미스터리 작품에서 마더구스의 동요를 차용하여 주로 범인이 그 동요의 내용대로 살인을 저지르는 패턴이 많다는 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 『주머니 속의 호밀』.

아가사 크리스티, 『주머니 속의 호밀』.

 
1953년에 발표된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 ‘주머니 속의 호밀(원제: A Pocket Full of Rye)’은 마더구스의 동요 가운데 하나인 검은 새(blackbirds)를 차용한 대표적 작품이다. 동요의 노랫말에 빗대어 연쇄살인이 발생하는 ‘비유 살인’ 작품인 셈인데 치밀한 배경설정, 빈틈없는 논리전개, 폭발적인 상황 반전으로 통쾌하지만 한편으론 애잔한 여운을 남기며 장을 마무리하는 크리스티의 뛰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는 걸작이다. 검은 새의 노랫말 일부를 들어보자.
 
“왕은 회계실에서 돈을 세고 있었네(The king was in his counting house, counting his money).”
“왕비는 거실에서 꿀빵을 먹고 있었네(The queen was in the parlour eating bread and honey).”
“하녀는 정원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데, 그때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코를 싹둑 잘라 버렸네(The maid was in the garden hanging out the clothes, when there came a little dickey bird and nipped off her nose).”
 
자, 이제 연쇄 살인사건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금융회사 사장 포티스큐가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던 중 사망한다. 효과가 늦게 나타나는 독극물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된다. 닐 경위는 포티스큐의 젊은 후처, 아버지의 사업에 관여하는 큰아들과 그의 아내, 지적인 미모의 관리인이 모인 저택으로 향한다. 그러나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던 젊은 후처 아델이 살해되고, 자택의 하녀인 글래디스가 교살당한 채 시체로 잇달아 발견되면서 수사는 생각만큼 진전되지 않는다.
 
“남편은 누군가에게 독살당했어. 식중독이 아닌 실제 독극물에 의해서 말이야(He was poisoned by someone. Not food poisoning, real poisoning).”
“경찰은 우리 중 누군가가 그를 살해했다고 믿고 있다는 거야.” 아델이 말하자, “그건 그들이 밝혀야 할 책임이죠(That’s their pigeon)”라고 둘째 아들 랜스가 위로하듯(consolingly) 대답한다.
 
아델 포티스큐 부인이 찻잔쟁반 뒤 소파에 앉아있었지만 거실의 불은 켜져 있지 않았다. “불을 켜 드릴까요, 포티스큐 부인?(Shall I switch the lights on, Mrs. Fortescue?)” 집안 관리인 메리가 묻자 아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메리가 불을 켜고 고개를 돌린 순간 마주한 것은 쿠션에 축 처진 채로 기대어있는 여자의 얼굴이었다(It was only then that she turned her head and saw the face of the woman who had sagged back against the cushions).
 
반쯤 먹다가 만 꿀 바른 빵이 그의 곁에 있었고 마시다 만 차는 반쯤이나 남아 있었다(A half-eaten scone spread with honey was beside her and her tea cup was still half full). 죽음이 갑작스레 아델 포티스큐 부인에게 다가왔다(Death had come to Adele Fortescue suddenly and swiftly).
 
“마신 차에 청산가리가 들어 있었어요(Cyanide in the tea).” 의사가 말하자,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었던(She was cast as a murderess), 그가 이제는 희생자가 되었네요(And she turned out to be a victim).”
 
유력한 용의자(appropriate suspect)로 지목되었던 아델 포티스큐 부인이 의문의 살인 사건 두 번째 희생자(the second victim of an incomprehensible murder case)가 되면서부터 가닥이 잡혀가는 듯이 보였던(A case that seemed to be shaping in well known fashion) 사건이 꼬이기 시작했다(had gone haywire).
 
한편 사전 연락 없이 외출한 것으로 알았던 하녀 글래디스의 시체가 빨래집게로 코가 집힌 채 뒤늦게 발견되면서(Gladys with the clothes peg on her nose) 사건은 자꾸만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데….
 
이때 미스 마플(Miss Marple)이 등장한다. 에르퀼푸와로(Hercule Poirot)와 함께 아가사 크리스티 미스터리의 단골 해결사, 미스 마플은 인자하고 연약한 모습을 지닌 여느 마음씨 좋은 할머니와 다르지 않다.
 
영국 BBC에서 방영한 '미스 마플' 시리즈 중 '주머니 속의 호밀'의 한 장면. [사진 BBC]

영국 BBC에서 방영한 '미스 마플' 시리즈 중 '주머니 속의 호밀'의 한 장면. [사진 BBC]

 
“살인자가 누구죠, 미스 마플? 자, 당신의 의견을 들어 봅시다(The killer, come now, Miss Marple, let’s have your ideas about the killer, Who was he?).”
 
“그는 항상 나쁜 사람이었어요. 언제나 말이죠(He’s always been bad. Bad all through). 한편으론 매력적, 특히나 여자들에겐 매력적이긴 했지만요(Although with it he’s always been attractive. Especially attractive to women). 총명하지만(brilliant), 비도덕적이고(unscrupulous), 무모한(foolhardy) 전형적인 지능 살인범이랄까요?”
 
전율이 감도는 반전의 결말이다. 부정으로 축적한 아버지의 재산에 눈이 어두운 친아들의 연쇄살인이다. 가엾은 글래디스를 희생양으로 삼아서 말이다. 살인자의 달콤한 속임수에 빠져 살해되면서까지도 그를 자신의 연인으로 생각하는 불쌍한 글래디스. 크리스티만이 연출해 낼 수 있는 잔인한 미스터리극의 애잔한 대단원이다.
 
어슴푸레하고 불길한 로맨티시즘의 향기를 희미하게 풍기며 능수능란한 스토리텔링으로 독자를 마지막까지 책에 붙들어놓는 원숙한 걸작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두 명의 친아들 중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자본주의 체제에 사는 우리는 모두 물질적 풍요로움을 갈망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남보다 더 큰 파이를 차지하려는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자본주의 체제의 효율성은 역사가 곧 증명하고 있다. 문제는 자본주의의 물신주의 풍조가 팽배하여 온갖 병폐를 양산하는 왜곡된 사회구조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돈 앞에서는 지위도 명예도 혈연도 내팽개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국민 앞에서는 집값 안정을 위한답시고 감언이설을 떠벌리는 국정 책임자들이 뒷전으로는 자신의 사익을 챙기는 부동산 투기부터, 재산 상속을 둘러싼 재벌 기업가 형제들의 낯 뜨거운 혈투, 심지어는 돈에 눈이 멀어 자신을 낳아준 친부모를 살해하는 존속살인의 하극상까지, ‘사람 위에 돈’이라는 자본주의의 세기말적 풍경을 보여주는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존속살인은 어느 새부턴가 미스터리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위협이 되어 버렸다.
 
신이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동 양식을 제약하던 암울한 중세 시대를 거쳐 인간 중심의 찬란한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듯이, 자본주의의 신격화된 페르소나가 벗겨지고 인간 본연의 순수함이 회복되는 ‘제2의 르네상스’의 도래를 꿈꾸는 것은 진정 지나친 바람에 불과한 것일까.
 
이광현 아름다운인생학교 강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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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현 이광현 아름다운 인생학교 강사 필진

[이광현의 영어추리소설 문학관] 영어 추리소설을 즐겨읽는 아름다운 인생학교 강사. 우리 모두는 '페르소나'를 쓴 이중적 인격의 소유자이다. 현대 사회가 설정한 패러다임에서는 누구나 가식적 가면을 하나씩 지닌 채로 본연의 나를 감추고 살아간다. 등장인물의 인간관계라는 드라마속에서 빈틈없는 논리 전개와 극적인 반전을 구사하여 페르소나를 벗겨내고 '인간의 민낯'을 들춰내는 대표적 추리 소설 작품을 통해 인간 본래의 모습이 복원되는 사회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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