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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호주 표심 가른 ‘퇴직연금의 정치학’

중앙일보 2019.05.23 00:07 종합 29면 지면보기
강혜란 국제외교안보팀 차장

강혜란 국제외교안보팀 차장

지난 18일 열린 호주 연방의회 선거 때, 마침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주최한 한·호주 언론교류프로그램 참가차 호주를 방문 중이었다. 집권 자유국민연합의 뜻밖 승리에 “노동당이 도저히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표심의 배경이 궁금했다.
 
투표 다음 날 만난 현지 워클리재단의 헬렌 존스톤은 노동당 주요 공약이었던 세제 개혁과 관련한 시부모의 우려를 설명해줬다. 노동당은 선거 막판에 ‘top end of town’ 우리말로 ‘수퍼부자’쯤 되는 이들을 표적으로 한 증세 계획을 냈다. 납세자 상위 10%에 대해 향후 4년간 320억 호주달러를 더 거둬서 육아·학교 시설 등 복지 예산에 쓴다는 건데, 그 중 수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 세액 공제 철폐가 특히 논란이 됐다.
 
수퍼애뉴에이션이란 1992년 호주가 도입한 퇴직연금제도로 근로자 연봉의 일정분(현행 9.5%, 단계적으로 12%)을 강제 적립하는 제도다. 엄격한 의무가입에다 법적 사유가 없는 한 은퇴 수령 연령 전까지 손을 못 댄다. 그런데 노동당이 이 수퍼애뉴에이션 수령자 중 상위 계층에 대해 세액 공제 철폐를 주장한 게 문제가 됐다. 집권당이 이를 노후자금에 대한 ‘또 다른 증세’라고 몰아붙이면서 민심이 요동쳤다. 선거 프레임이 ‘정권 심판’에서 ‘공정 과세’로 돌아선 계기로 보인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호주는 여느 선진국 가운데 노후 대비가 잘된 나라로 꼽힌다. 연 수익률 9.2%(2017~2018 회계년도)에 이르는 수퍼애뉴에이션 외에도 국가가 주는 노령연금이 근로자 평균소득과 연동돼 적정 수준 생계를 보장한다. 이를 받쳐주는 게 인구 구조다. 호주의 출산율은 1.76명(2018년)으로서 세계 최저 수준(0.98명)인 한국은 물론 G20 국가들과 비교해 높은 편이다. 연 16만명에 이르는 이민 유입도 노동가능인구 확충에 기여한다. 이런데도 잘 사는 일부의 퇴직연금을 손대 양극화 해소를 추구하려던 노동당 계획은 좌초했다. 퇴직연금이 내 미래를 위한 적립이냐 우리 사회 안전망 구축을 위한 목돈 붓기냐의 인식 차이다.
 
지금 연금 내는 수많은 한국인은 호주인보다 훨씬 불리한 입장이다. 고령화 속도와 노인빈곤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출산율은 세계 최저다. 노후 보장용 국민연금은 고갈 위기인데 이를 보완할 퇴직연금 수익률은 지난해 말 기준 1%대에 불과하다. 호주 수퍼애뉴에이션을 둘러싼 부자증세 혹은 공정과세 논란이 차라리 부러울 지경이다. 글로벌 기관 평가에서 최하등급을 맴도는 연금제도 개선을 두고 내년 총선 때 한국 유권자들이 판단할 수 있는 각 당 입장이 있기나 한지 의심스럽고 걱정된다.
 
강혜란 국제외교안보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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