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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 몸에 들어간 영혼, 생사의 길목을 묻다

중앙일보 2019.05.22 00:03 종합 23면 지면보기
정유정 작가는 ’소설에 등장하는 보노보를 연구하는 데만 6개월을 쏟아부었을 만큼 사전 작업을 철저히 했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정유정 작가는 ’소설에 등장하는 보노보를 연구하는 데만 6개월을 쏟아부었을 만큼 사전 작업을 철저히 했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죽음 앞에서도 사람의 자유의지는 유효할까. 모든 것이 소멸하는 엄청난 공포 앞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의사 결정을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을까.
 

인기작가 정유정 신작 『진이, 지니』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 있을까”
죽음·성장 묵직한 얘기 밝게 풀어
28년 전 돌아간 어머니가 모티브
“새벽 3시부터 매일 14시간 집필”

정유정(53) 작가가 3년 만에 발표한 신작 『진이, 지니』는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작가는 여성 침팬지 사육사인 ‘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선택을 이야기한다.  21일 서울 서교동 은행나무출판사에서 만난 정 작가는 “죽으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자유의지가 사라진다. 그렇다면 죽음은 자유의지를 발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그런 상황에서 우린 어떤 선택을 할까 묻고 싶었다”고 말했다.
 
줄거리는 이렇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겪게 된 ‘진이’는 인간과 가장 흡사한 DNA를 가진 영장류 보노보 ‘지니’의 몸속으로 영혼이 이동한다. 이후 ‘진이’는 우연히 알게 된 청년 백수 ‘민주’와 함께 상황을 원점으로 되돌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전작에서는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등 인간의 본성을 파고드는 다소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을 선보여왔다면, 이번엔 ‘죽음’과 ‘성장’이란 보편적인 주제를 보다 밝은 톤으로 다뤘다.
 
◆“죽음, 어머니가 남긴 과제”=‘죽음’을 이야기의 실마리로 삼은 이유에 대해 작가는 “언젠가는 꼭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내겐 과제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내가 25살이었을 때 어머니께서 내가 근무하던 병원에서 돌아가셨다(정 작가는 과거 간호사로 일했다). 어머니의 죽음은 내게 트라우마가 될 만큼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나의 삶을 짓눌러왔다. 이를 글로 풀어나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보노보는 DNA의 98.7%가 인간과 일치하며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 [AFP=연합뉴스]

보노보는 DNA의 98.7%가 인간과 일치하며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 [AFP=연합뉴스]

어머니의 죽음이 이토록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이유에 대해선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어머니에게 의지했다. 어머니는 평생 약한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강인한 분이셨다. 그런 분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게 엄청난 충격이고 상처였다”고 설명했다.
 
작가가 초창기 작품부터 ‘자유의지’라는 주제에 천착하게 된 것도 어머니 영향이 컸다. “어머니가 워낙 강한 성격이다 보니 그분에 의해 내 삶의 많은 부분이 결정됐어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국문과에 진학해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억지로 간호대에 보낸 것도 어머니였어요. 본인이 간호사였기 때문에 딸도 간호사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셨겠죠. 어머니 밑에서 나는 내 의지를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어요.”
 
어머니의 죽음 뒤에도 자기 뜻대로 살 수 없는 세월은 이어졌다. 아버지와 동생을 보살펴야 했고, 결혼하고 나니 세월이 훌쩍 흘렀다. 결국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그토록 쓰고 싶었던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정 작가는 오히려 이런 배경이 글을 쓰는 강력한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 “모순적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없었기에 소설가로서 글을 쓰고 싶은 욕망과 의지가 더 강해졌던 거 같아요. 자유의지에 대해 천착하게 됐고요. 만약 평탄하게 국문과에 갔다면 개성 없는 글을 쓰다 말았을지도 몰라요.”
 
◆보노보 연구하며 준비=소설은 죽음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지만, 또 다른 인물인 ‘민주’를 통해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되는대로 살아갔던 백수 민주는 진이를 돕는 과정에서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작가는 “민주는 그간 내가 소설에서 만들어낸 여러 인물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라며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찌질하지만, 스펀지 같아서 흡수력이 좋고 변화의 폭이 넓다. 민주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상상하는 것은 소설 쓰는 내내 즐거운 고민이었다”고 돌이켰다.
 
‘진이’의 영혼이 옮겨가는 존재로 보노보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보노보는 DNA의 98.7%가 인간과 일치한다. 인간만큼 공감 능력과 연대 의식이 뛰어나다. 인간이 진화되기 이전의 원형과도 같은 존재”라고 했다. 이어 “만약 사람이 죽음을 통해 어떤 세계로 돌아가면 인류의 원형인 보노보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상상했다”고 덧붙였다. 소설을 쓰기 전에 보노보를 연구하는 데만 6개월을 쏟아부었을 만큼 사전 작업도 철저히 했다.
 
◆등단 10년, “나는 매일 쓴다”=2009년 『내 심장을 쏴라』로 세계문학상을 받아 등단한 정 작가는 올해로 등단 10년을 맞이했다. 문단에서는 보통 10년 미만의 작가를 신인으로 치는데, 이제 신인 작가에서 벗어난 것이다. 정 작가는 “지난 10년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도전한 시간이었다”며 “신인 작가이기에 다양한 주제와 방식을 마음껏 실험해봤고 그러면서 나만의 글쓰기 스타일을 구축했다”고 했다.
 
정 작가는 매일 규칙적으로 글을 쓴다. 소설 작업을 시작하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오후 5시까지 원고를 썼다. “한 글자도 써지지 않는 날에도 책상 앞에서 이 규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오후 5시에 일을 마치면 저녁을 먹고, 두세 시간 운동을 한 다음 오후 10시쯤 잠자리에 드는 단순한 일과를 반복한다.
 
지난 10년에 대한 스스로 평가를 물었다. 정 작가는 망설이지 않고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그간 최선을 다해서 썼기 때문에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서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는 좀 더 나만의 이야기를 강화하는 쪽으로 나를 발전시키고 싶어요. 오랫동안 읽히는 힘 있고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습니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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