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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가정폭력' 남편 숨지게 한 아내…시어머니마저 선처 호소

중앙일보 2019.05.21 17:59
[연합뉴스]

[연합뉴스]

20년 넘게 가정폭력을 당한 주부가 흉기를 휘둘러 남편을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법원은 이례적으로 피고인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시어머니마저 며느리의 선처를 호소할 정도로 가혹했던 가정폭력에서 비롯된 범행을 개인의 잘못만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울산지법 형사11부(박주영 부장판사)는 상해치사로 재판에 넘겨진 A(49·여)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고 21일 밝혔다. 재판부는 "이런 비극적 결과를 전적으로 피고인 잘못으로만 돌릴 수 없는 사정을 인정하고 이를 양형에 참작한다"고 말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A씨는 27년 전 남편 B(53)씨와 결혼했다. 남편은 오랜 기간 직장생활을 했고 슬하에 두 자녀를 두는 등 겉으로 보면 평범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B씨는 결혼 초부터 술을 자주 마셨고 과음한 날에는 가족에게 폭언이나 폭행을 하는 일이 잦았다. 2006년부터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두 차례 입원까지 했지만 음주와 폭력적인 습벽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술 문제로 3년 전 직장을 그만둔 뒤 일용직이 됐고 이후 집에서 폭력적인 행동은 더 심해졌다. 위험한 물건으로 벽이나 방문 등을 찍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낀 A씨는 흉기가 될 만한 물건을 모두 숨겼다. 자녀들은 심리상담에서 아버지를 원망했고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생계유지는 A씨의 몫이 됐다. 
 
보다 못한 시어머니는 2017년 아들 B씨에게 "너의 술버릇이 가정·직장·자식들을 악마로 만드는 기막힌 행동이 계속되고 있으니 인간으로 행하는 올바른 행동인지를 가슴 깊이 느끼고 정신을 좀 차려라. 애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하지만 B씨의 술버릇은 나아지지 않았고 지난 1월 30일 끔찍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술에 취한 B씨는 A씨가 동생 집에서 늦게 귀가했다는 이유로 "너와 동생을 죽이겠다"며 흉기를 꺼내 들었다. 이를 만류하던 A씨가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식구들을 괴롭히냐"고 말하자 B씨는 "그러면 내가 죽겠다. 찌르라"고 A씨에게 흉기를 건내며 다가섰다.
 
남편을 계속 밀어내던 A씨는 상황을 모면할 생각으로 손에 쥔 흉기로 남편의 복부를 한 차례 찔렀다. 놀란 그는 119에 신고하고 지혈을 시도했지만 병원으로 옮겨진 남편은 끝내 숨졌다. 
 
애초 경찰은 살인 혐의로 A씨를 송치했다. 그러나 검찰은 살인의 고의가 없었다고 판단해 상해치사죄로 기소한 뒤 징역 4년을 구형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는 '아들이 평소 술을 자주 마신 뒤 가족을 힘들게 했지만 피고인(며느리)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이를 참아냈고 시댁 식구에게도 최선을 다했다. 두 자녀에게도 엄마가 꼭 필요하니 선처해 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수차례 제출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가족의 간절한 희망에도 피해자의 주취폭력을 멈추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강도가 세졌다"며 "피해자 유족이 선처를 탄원하고 피고인이 구금 기간 내내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이어 "피고인을 집행유예로 석방하는 결정은 결코 피해자의 생명을 가볍게 보거나, 사건의 주된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음을 들춰내려는 것이 아니다"고 전제하면서 "피해자를 비참한 죽음에 이르게 한 알코올 중독의 심각성에 경각심을 일깨울 필요가 있고, 평범한 가정조차 개인의 음주 문제로 비극적 결과에 이른 데 대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는 없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또 "가정폭력은 가족 구성원과 그들이 사는 사회에도 영향을 미쳐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거나 세대 간 전이되는 등 폭력을 구조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며 "이 참혹한 결과를 돌아보고 이를 근절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강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환기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김지혜 기자 kim.jihye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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