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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 칼럼] 미래세대를 위한 비례대표

중앙선데이 2019.05.18 00:20 636호 31면 지면보기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

3년 전,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맞아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에서는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한 바 있다. 국회의원에 출마한 후보들에게 ‘당신에게는 미래세대를 위한 공약이 있나요?’를 묻는 캠페인을 벌였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미래세대까지
누릴 수 있는 지속가능한 행복
다음 세대가 더 행복한 사회가
현세대가 가장 원하는 사회 아닌가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미래세대를
대변하는 자리’로 정의하면 어떨까?

여기서 미래세대란,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미성년자여서 현세대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는 없으나, 현세대의 정책에 영향은 받는 세대’를 뜻한다. 참정권이 없다 보니 아무도 그들을 대변해주진 않지만, 현세대의 의사결정에 크게 영향을 받는 억울한 세대들을 위해 국회의원들에게 공약을 요청하는 매니페스토 선거운동이었다.
 
우리가 이 실험을 진행하게 된 것은 2005년 8월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이 경북 경주시로 결정되면서 경주는 3000억원의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 받았으나, 대부분이 시민의 편익을 위해 사용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돼서다. 마땅히 그 보상금은 폐기물 처리장이 설립되면 그 지역에 살게 될 미래세대들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일정 보상금이 사용돼야 하는데, 현 시민들의 의사결정으로 축구장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고 하니 울화통이 터져서였다.
 
방사성 물질로 인한 환경오염은 그 지역에서 살아갈 다음 세대에까지 혹여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이를 대비한 기금을 조성해야 한다는 어른들은 별로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무런 준비 없이 이전 세대가 물려주는 물리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유산을 무조건 감내해야만 하는 미래세대는 과연 누가 대변해줄 수 있을까’하는 근본적인 회의가 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KAIST에서는 미래세대행복위원회(위원장 김경동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들어 20대 국회의원에 출마한 후보들의 공약을 분석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 결과, 당시 23개 정당 중에서 12개 정당은 아예 미래세대를 위한 공약이 없었고, 나머지 11개 정당마저도 과도한 입시교육·청년실업 등 현세대의 구미에 맞는 미래세대 이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 총선에서 ‘미래세대 희망노트’(www.futurepolicy.net/)라는 매니페스토 운동을 야심 차게 추진했다.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모든 지역구 및 비례대표 후보자들에게 ‘미래세대를 위하여 과연 어떤 구체적인 비전과 공약을 제시하는지 직접 묻고, 이를 실천하는지도 끝까지 모니터링 하겠다는 운동’이었다. 총 943명의 총선 지역구 후보들과 비례대표 후보들에게 미래세대 희망노트 사이트에 접속해 미래세대를 위한 공약을 명시하도록 요청하고, 시민들이 그것을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사이트를 운영했다. 이 운동은 방송과 신문에 소개되면서 많은 호응을 얻었다.
 
과연 그 결과는 어땠을까? 시민이나 언론의 반응과는 달리, 국회의원 후보들에게는 참담할 정도로 냉담한 반응이 돌아왔다. 다음 세대를 위한 공약을 만들려는 노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표에도 직접적인 연결이 안 되기에, 캠페인에 동참하는 후보들도 적었다. 그들의 공약집엔 지역발전 이슈들만 여전히 난무했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국회의원들에게 다음 세대까지 챙기라고 하는 건 너무 무리한 요구 아니냐, 반문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다른 나라는 어떨까?
 
북유럽에서는 미래세대란 개념을 일찌감치 만들고 제안한 후 그들을 위한 정책을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예를 들어, 세계 7위의 원유 수출국인 노르웨이는 현세대가 석유 자원을 사용하여 벌어들인 수익으로 미래세대를 위한 국부펀드를 조성했다고 한다. 석유 고갈 후에도 후손들이 충분히 생활할 수 있도록, 석유기업들로부터 받은 세금을 기반으로 하여 현세대가 미래세대를 위한 재원을 마련한 것이다.
 
스웨덴도 핵연료 처분장 보상액 3000억원을 미래세대를 위한 기금으로 조성해 현세대가 이를 탕진해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하고 있다고 한다. 제도만 잘 만든다면, 우리도 못 할 것 없다. 누군가는 현세대의 이익에만 급급하지 말고, 긴 호흡으로 지역의 미래를 내다보았으면 좋겠다.
 
얼마 전 대한민국은 패스트트랙(신속처리법안)과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들썩였다. 이참에 비례대표 국회의원은 ‘미래세대를 대변하는 자리’로 정의하면 어떨까? 비례대표는 장기적 관점에서 국가의 지속가능한 행복을 위한 입법을 하는 역할로 규정하면 국가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도 어렵다면, 정부에서 ‘미래세대를 위한 위원회’라도 만들어주길 제안 드린다.
 
지금의 제반 국가적 조건은 현세대가 미래세대로부터 잠시 빌려서 사용하는 것이기에, 지역 개발을 겨냥한 기성세대의 결정은 미래세대를 포함해 장기적인 비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현세대의 행복만이 아니라, 미래세대까지 누릴 수 있는 지속가능한 행복이다.
 
다음 세대가 더 행복한 사회가 우리 현세대가 가장 원하는 사회 아닌가! 그렇다면 미래세대의 자원을 그저 당겨쓰기만 하지 말고, 장기적 관점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 운영하고 지속적으로 실천되길 희망한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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