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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미치코’에서 ‘마사코’로

중앙일보 2019.05.17 00:22 종합 29면 지면보기
윤설영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MICHIKO LONDON’은 1980년 대 꽤 인기있는 옷 브랜드였다. 나름 ‘옷 좀 입는다’ 하는 친구들은 하나씩 갖고 있는 ‘잇 템’이었다. 그런데 누군가로부터 “일본 왕비 이름이 적힌 옷이 뭐가 좋으냐”라는 핀잔을 듣고는 왠지 ‘입어서는 안되는 옷’이 되어버렸다.
 
외국브랜드 옷을 입는 것만으로도 손가락질을 받는 시절이기도 했지만, ‘민족의 원수(?)’ 이름이 새겨진 옷을 입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뭘 알고 그런 건 아니었고, 그 땐 분위기가 그랬다. 그 브랜드가 미치코 코시노라는 유명 디자이너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그로부터 꽤 나중의 일이었다. 미치코 왕비와 관련이 없음은 물론이다.
 
아키히토 일왕 재임 중 미치코 왕비의 존재는 꽤 컸다. 두 내외가 평화를 존중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왔던 건 가톨릭학교를 나온 미치코 왕비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왕실의 자녀들은 3살이 되면 왕실의 신하가 양육을 하는 관례를 깨고, 미치코 왕비는 2남 1녀를 모두 자기 손으로 길렀다. 장애아동 시설을 자주 찾거나, 결혼식 때 받은 축의금으로 어린이를 위한 놀이공원을 만드는 등 약자를 배려하고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는 행보를 보여줬다.
 
글로벌 아이 5/17

글로벌 아이 5/17

2017년 반핵 NGO단체인 ICAN이 노벨평화상을 받자 “일본인 피폭자들의 마음이 결코 전쟁의 연쇄로 이어지는 ‘보복’이 아닌, 평화의 희구로 향하길 바란다”는 발언을 해 화제가 됐다. 아베 정부가 논평 내기를 꺼리고 있을 때 한발 빠른 대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미치코 왕비(퇴위 후 상왕후)의 존재 때문인지 지난 1일 즉위한 나루히토 일왕보다 마사코 왕비의 역할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달 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면 영어에 능통한 마사코 왕비의 활약이 기대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2014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국빈방문을 했던 전례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 옆에 마사코 왕비가 앉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결혼과 함께 포기해야했던 외교관의 꿈을 왕실외교를 통해 실현시킬 수 있지 않겠냐고도 한다. 여기에 결혼 후 적응장애, 난임 등으로 고생했던 개인사까지 들춰가며 호사가들의 입이 바쁘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일본 국민들이 바라는 일왕의 모습도 달라지고 있다. 특히 전후세대 첫 일왕인만큼 전쟁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는 당당한 일왕으로서의 기대도 일본 내에선 느껴진다. 마사코 왕비가 레이와 시대 새 일왕상(像)을 구현하는데 역할을 잘 해주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이웃국가 국민으로서 한국인에게도 친근감이 느껴지는 존재로 기억되기를 내심 바라본다.
 
윤설영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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