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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의 시선] 고르디우스 매듭 풀 한국판 알렉산더는?

중앙일보 2019.05.17 00:21 종합 29면 지면보기
이정민 논설위원

이정민 논설위원

최인훈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신물나는 이념 대결에 환멸을 느낀다.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던 날, 적대해 싸우는 남과 북을 등지고 중립국 행을 결심한다. 사실 이명준이 절망한 건 피비린내 나는 두 세력의 대결, 그 뒤편에 감춰진 사악한 민낯이었다. 인천 부두에서 이북으로 가는 밀수선을 알선해 준 선술집 주인을 수태고지 천사로 여겼던 그다. 어리석게도 ‘바닷물을 한 잔의 영생수로 바꿔준다는 마술사의 말’을 곧이 믿었던 이명준은 무엇이든 이뤄줄 것 같은 현란한 구호가 기실은 “권력이란 약을 팔려고 말로 속인 꾀”임을 간파한다. 선택의 갈림길, 이명준은 두 개의 조국을 부정함으로써 마침내 질식할 것 같은 현실에서 탈출하려 했다.그의 절규가 귓등을 때린다.
 

꼬인 정국 푸는 발상 전환 필요
권력독점 깨는 개헌 논의해야
증오·분열 정치 극복할수 있어

“한국 정치의 광장엔 똥 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였어요. 모두의 것이어야 할 꽃을 꺾어다 저희 집 꽃병에 꽂고, 분수 꼭지를 뽑아다 저희 집 변소에 차려놓고.”
 
“일이면 일마다 저는 느꼈습니다.제가 주인공이 아니고 ‘당’이 주인공이란 걸. ‘당’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한숨지을 테니 너희들은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
 
소설이 씌여진 지 58년이 지났건만 ‘광장’의 유통 기한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같다. 70년 넘도록 극복 못한 건 분단 만이 아니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잉태한 보수와 진보의 격돌이 오히려 남북 대결 못잖다. 문재인 대통령은 “분열과 갈등의 정치를 바꾸겠다”며 통합정부를 공약으로 내걸어 당선되고도 말과는 다른 길을 가는 듯하다. ‘적폐 청산’은 ‘보수 배제’ ‘자유한국당 패싱’과 동의어가 돼버렸다.
 
“독재 통치자들의 후예가 독재타도를 외치고, 헌법을 유린한 사람들의 후예가 헌법수호를 외치는 국회를 제가 어떻게 그냥 두고 떠나겠는가. 반드시 청산할 사람은 청산하고 제가 정치를 마무리 하겠다.”(이해찬 민주당 대표)
 
“탄압이 심하면 저항도 강해질 것이다. 독재 국가를 만들어 정권 마음대로 하려는 것, 죽을 각오로 막아야 한다. 정권이 폭력으로 우리를 짓밟으려 한다면 저부터 짓밟히겠다.”(황교안 한국당 대표)
 
정치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다시 절망으로, 이젠 환멸로 바뀌었다. 촛불시민의 차지였던 광장엔 이제 태극기와 “독재타도”의 함성이 거칠다. 이명준이 품었던 회의와 원초적 물음이 피어오른다. 왜 5년 주기로 되풀이되는 지독한 증오와 분열의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왜 상대편을 고꾸라뜨리고 넘어뜨려 짓밟아야 하는 존재로만 인식하는가. 법에 의한 지배, 권력자가 제왕으로 군림하지 않는 공화주의, 인권이 존중되고 상식이 통하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자는 촛불광장의 다짐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난장판 정국의 도화선이 된 3개 법안의 패스트 트랙(신속처리 안건) 지정이 국회를 통과한 날, 조국 민정수석은 “촛불혁명 시민들의 요청이 법제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라며 승전가를 불렀다. 하지만 작심하고 반기든 검찰, 패스트 트랙 지정에 반대했던 바른미래당의 오신환 원내대표 선출 등 복병의 출현으로 한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워졌다. 삼중, 사중의 더께 매듭에 또다른 매듭이 얹혀지는 형국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 버렸다는 알렉산더 대왕같은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매듭을 풀 열쇠는 작년 12월15일 여야 5당 원내대표가 작성한 합의문 6항에 있다. ‘선거제도 개혁 관련 법안 개정과 동시에 곧바로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원 포인트 개헌 논의를 시작한다.’ 권력의 독점 구조를 깨는 게 개헌 논의의 핵심이다.모든 권력이 한 곳으로 모이는 지금의 시스템을 개혁해야 진정한 변화가 가능해진다. 대통령 직선제의 골간을 유지하면서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총리를 선출하는 원포인트 개헌은 어떤가. 국민의 표로 당선된 대통령과 국회의 지지를 받는 총리가 머리 맞대고 국정을 숙의하게 될 것이다. 총리가 실질적인 장관 인사제청권과 해임건의권을 갖게 되므로 청와대의 독단적인 밀실 인사는 불가능하거나 상당히 개선될 수 있다. 인사검증 실패, 인사 참사란 말은 사라질 것이다. 국회가 총리 인사권을 갖는 셈이니 정부는 국회와 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여야의 협치가 절로 이뤄지니 국회의 생산성도 높아질 게다. 권력에 줄서는 ‘정치 검찰’이란 오해를 벗을수 있다면 공수처, 검경 수사권 조정의 양상은 달라질 것이다.
 
누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한국판 알렉산더’가 될 것인가. 이제는 진보, 보수 모두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양쪽 다 복수할 명분과 보복당할 약점을 안고 있다. 권력 좀 휘둘러 봤다는 분들, 발 뻗고 자고 싶지 않은가.
 
이정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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