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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의 시선] ‘시민 혁명’이 망하는 길

중앙일보 2019.05.16 00:05 종합 33면 지면보기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2011년 2월 11일 밤,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 있었다. 30년간 집권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바닷가 별장으로 도망친 그날이다. 대통령 하야 성명이 저녁에 TV를 통해 발표되자 시민들이 광장으로 몰려나왔다. 전 달 25일부터 그 광장과 주변에서 연일 시위·집회가 이어졌다. 관청과 정부 시설이 밀집해 있는 지역 입구마다 장갑차들이 진을 쳤고, 그쪽으로 ‘진격’하는 시위자에게는 총알이 날아들었다. 건물 옥상에서 무바라크의 친위대 역할을 해 온 보안경찰대가 조준 사격을 했다. 그 17일간 시위로 인한 이집트 전역의 사망자는 훗날 840여 명으로 집계됐다.
 

‘통합’ 약속하고도 권력구조 집착
정파적 이해에 치우쳐 ‘대의’ 망각
이집트·리비아 봉기 실패한 이유

그 밤에 광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옆 도로도 사람으로 꽉 찼다. 당시 기사에 인파 규모를 수십만으로 적었다. 시민들은 웃고, 떠들고, 고함쳤다. 승리의 기쁨이 넘쳐났다. 광장 앞 연단에 시위를 주도해 온 사람들이 잇따라 올라가 격앙된 목소리로 연설했다.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통역해 준 현지 중앙일보 통신원에 따르면 연설 내용은 공히 ‘새로운 이집트’ 건설에 대한 희망이었다.
 
이듬해 봄, 그 나라에서 대선이 치러져 이슬람 운동조직 ‘무슬림 형제단’이 내세운 모하메드 무르시가 대통령이 됐다. 그는 1차 투표에서 25.3%를 득표했다. 군부 출신 후보와 결선을 치르게 된 무르시는 무슬림 형제단이 국가를 장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며 중도층 표를 흡수해 간신히 과반 득표(51.7%)에 성공했다. 약 절반 지지로 권력을 얻게 된 그는 반년 뒤에 대통령 결정은 최고 법원의 판결로도 막을 수 없도록 헌법을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통합’의 정신은 사라지고 무슬림 형제단이 국가 요직을 독차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시민들은 민생 개선을 기대했는데, 집권 세력은 권력 구조에 집착했다. 국민에게 다가가지 않았고, 자기편으로만 향했다. 결국 새로운 나라를 꿈꿨던 시민들이 다시 광장으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군부는 이 혼란을 틈타 쿠데타를 감행해 무르시 대통령을 감금했다. 이집트는 다시 군부 통치로 돌아갔다. 지금도 군 출신이 대통령이다.
 
2011년 8월 22일 낮,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의 녹색 광장(현재 이름은 순교자 광장)을 처음으로 밟았다. 무아마르 카다피가 대중 연설에 애용했던, 트리폴리의 랜드마크다. 그해 봄 리비아를 오가며 시위·내전을 취재했지만, 그곳까지 갈 수는 없었다. 카다피 정부는 골라서 초청한 외신 기자에게만 입국을 허락했다. 대다수 기자는 시민군 점령 지역에 머물러야 했다. 나토군 폭격과 시민군 진격으로 패배와 퇴각을 거듭한 카다피 군은 이날 트리폴리 외곽으로 내뺐다. 그 공간을 픽업트럭을 타고 달려온 시민군이 차지했다. 시민군은 감격에 겨워 하늘을 향해 소총과 기관총을 마구 쏘아댔다. 총알이 땅으로 다시 곤두박질쳐 광장 안팎에 떨어지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새날이 왔다고 믿는 얼굴들이었다.
 
도주를 거듭하던 카다피는 두 달 뒤 고향 인근 농지의 시멘트 파이프 수로관에 숨어 있다가 시민군에게 발각돼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트리폴리에서 차로 두 시간 이상 달려 가 본 42년 독재자의 마지막 은신처에는 ‘자유 리비아’를 외치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평화의 날이 왔다고 말했다.
 
시민 혁명 세력은 정부 구성에 착수했다. 총선이 치러졌고, 새 헌법 제정과 그에 따른 통치 체계 완성 때까지 나라를 이끌, 국가원수 격의 제헌의회 의장이 선출됐다. 누리 아부사흐마인. 그가 새 지도자였다. 그는 집권 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유착했다. ‘리비아 혁명 작전 본부(LROR)’라는 이슬람계 무장조직을 비밀리에 지원하고, 여대생들은 히잡을 쓰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다. 지지 기반을 다지기 위해 특정 정파·이념의 수호자처럼 행동했다. 그 사이 목숨 걸고 싸운 청년들이 바랐던 자유롭고 풍요로운 나라는 딴 세상 이야기가 됐다. 결국 혁명 세력은 여러 갈래로 분열했고, 지금 이 순간까지 서로 총구를 겨누며 내전을 벌이고 있다.
 
혁명적 도약은 정치 구호일 뿐이며 발전은 그 나라 국민 수준에 따른 점진적 개량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반면 한편엔 혁명의 효용성을 믿으며 그것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집권 세력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다. 때때로 ‘피플 파워’는 시민 봉기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 혁명의 기운에 올라탄 정치 세력이 갑남을녀가 광장에서 외쳤던 보편적 가치에서 멀어지는 순간 꿈이 신기루가 된다. 역사가 거듭 보여 줬는데도 전 세계 신흥 권력자들이 자꾸 잊어버리는, 실패한 시민 혁명의 교훈이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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