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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연의 시시각각] 마니 풀리테

중앙일보 2019.05.16 00:05 종합 34면 지면보기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다혈질에다 패밀리 개념이 살아 있는 국민 성향에 익숙한 느낌을 받는다. 자기 경험을 일반화해 남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꼰대질’이 많고, 남의 꼰대질엔 유독 힘겨워하는 자존심 강한 정서도 닮았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와 ‘그래 너 잘났다’의 심리 말이다. 그래선지 한국과 비슷한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이탈리아란 말이 있다. 소란한 국민 기질이 만드는 요란한 정치가 특히 그렇다.
 

전 총리와 국회의원 절반 기소했던
이탈리아 사정에도 부패 여전한 건
‘내가 먼저’의 동력 만들지 못한 탓

누구든 할 말이 많다. 탐관오리도 많았겠지만 정조는 60여 차례 궁궐 밖 행차에 3000건이 넘는 ‘소란’을 처리했다. 억울함을 들어주는 방식마저 요란했다. 왕의 행렬을 멈춰 세우는 일이고, 그것도 잦다 보니 사리에 맞지 않거나 사소하면 추후 곤장으로 다스렸다. 그래도 줄지 않자 일단 먼저 때리고 나중에 사연을 듣는 식으로 진정성을 요구하는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매타작 줄이 짧아진 건 아니라지만.
 
지금은 청와대 게시판이다. 사리에 맞아 정책화를 시도할 수 있는 청원이 전혀 없다고 만은 할 수 없다. 하지만 큰 흐름은 그냥 열성 지지층의 묻지마 결집이다. 도무지 청와대가 나설 수 없는 사안에, 분노 지수를 최대한 끌어올린다. 어느 연예인을 사형 시켜 달라 거나 ‘국가에서 미팅을 주선해 달라’는 낙서 수준의 황당 요구는 양념이다. ‘청와대 청원 사이트를 폐쇄해 달라’는 청원도 함께 있다. 말하자면 태반이 ‘곤장감’이다.
 
물론 왕조 시대가 아니다. 여기까진 그럴 수 있다. 중요한 건 자기들이 주도하는 의제와 야권 공격을 뒷받침하는 용도로 청와대가 즐기고 앞세운다는 사실이다. 자유한국당 해산 청원이 우선 그렇다. 청와대 게시판서 연일 사상 최고 수치더니 ‘분열과 대립을 부추기는 정치론 희망이 없다’는 대통령의 질책 발언이 나왔다. 말이 정치지, 누가 봐도 한국당을 꾸짖었다. ‘김학의·장자연 청원’ 폭주가 대통령의 ‘철저한 수사’ 지시, 공수처 설치법 패스트 트랙의 코스를 밟은 것도 오비이락(烏飛梨落)만은 아닐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서, 말하자면 장외 투쟁인 쟁점 법안 처리 촉구 서명운동에 참여한 게 지금처럼 취임 3년차가 막 시작된 시점이었다. 국회, 실제론 야당을 외면한 채 직접 국민을 상대로 정치하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실제로 그랬다. 이후 노동법 등의 쟁점법안 처리를 놓고 말로는 국회, 내용적으론 야당을 거칠게 비난하는 일이 잦았다. ‘국회를 심판해 달라’고 주문했고, 진박 감별이란 코미디가 나왔다. 그때 야당 대표였던 지금 대통령은 ‘야당과 비박근혜계에 대한 노골적인 낙선 운동’이라고 펄펄 뛰었다.
 
그래 놓곤 판박이다. 지지층만 바라보고 지지층을 앞세우는 정치가 분열의 정치고 대립을 부추기는 정치다. 5년 전엔 재계를 앞세운 야당 압박에 대통령이 힘을 실었고 지금은 가짜 뉴스와 여론 왜곡 논란에 휩싸인 국민청원 게시판이다. 전두환 정권의 군부 독재를 끝장낸 건 6·10 민주항쟁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정권이 노태우 정권을 민주항쟁 정부로 부르진 않는다. 스스로도 마찬가지다. 자칭 ‘촛불 정부’라는데 정확하겐 촛불 정신을 실천해야 할 정부다. 내 편만 아는 분열의 정치를 탄핵한 게 촛불 정신이다. 소통과 협치로 가라는 게 촛불 민심이다.
 
전직 총리 등 4600명을 구속하고 국회의원 절반을 기소한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의 이탈리아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부패로 골머리다. ‘더럽지 않은 손은 없더라’는 주체 세력을 향한 반격에 국민들이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당시 사정을 이끈 피에트로 검사는 “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를 찾아냈을 뿐 항체 개발의 후속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분노의 칼로 무너뜨리는 건 쉽다. 문제는 새질서를 만드는 거다. 불과 2년 전 ‘분열과 갈등의 정치를 바꾸겠다’는 대통령 취임사에 국민들은 큰 박수를 보냈다. 
 
최상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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