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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밥 주문하면 칼국수·냉면 서비스…이런 식당 어디?

중앙일보 2019.05.13 13:00
[더,오래] 홍미옥의 폰으로 그린 세상(26)
“사와디카 천카, 슬라맛 다땅, 환 잉 꽌린.” ('어서 오세요'의 태국어, 인도네시아어, 중국어)
도대체 대한민국인지 낯선 나라인지 모를 정도로 외국어가 난무하는 이곳은 남대문시장이다. 그중에서도 칼국수 골목이 가장 붐빈다. 점심시간을 한참이나 남겨두고 있지만 좁은 골목 안엔 발 디딜 틈이 없다. 일명 '남대문 먹자골목 3종 세트'를 맛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인다.
 
남대문시장 먹자골목 3종 세트를 아시나요?
칼국수 3종 세트로 외국인에게도 인기인 남대문 시장 칼국수 골목. 갤럭시탭 S3,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칼국수 3종 세트로 외국인에게도 인기인 남대문 시장 칼국수 골목. 갤럭시탭 S3,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오늘도 지하철 4호선 회현역 5번 출구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중엔 여행 가방을 든 여행자도 있고, 쇼핑에 나선 중장년과 어르신도 있다. 모두 작정을 하고 나선 옷차림이다. 붐비는 시장에서 행여 있을 불상사를 막기 위해 가방은 앞으로 메고 발 편한 운동화로 무장(?)하고 있다.
 
그야말로 없는 거 빼곤 다 있다는 우리나라 최고의 시장인 남대문시장. 여기저기 빨간 옷을 입은 시장안내원들이 친절함을 발사하고 꽤 넓은 시장길은 왁자지껄 상쾌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시장쇼핑인들 오죽할까! 오늘은 소문난 갈치조림 골목 대신에 칼국수 골목이다.
 
비닐로 어설프게 만든 출입문이 있어 자칫하면 지나치기 쉬운 이곳. 언제 이리 소문이 났을까? 겨우 자리를 차지하고 좁은 나무걸상에 앉았다. 주인은 한손으론 칼국수를 끓이고 한손으론 보리밥을 그릇에 담아내며 이내 냉면 위에 비빔장을 얹어낸다. 이게 바로 소문난 남대문 칼국수 3종 세트다. 보리밥을 시키면 칼국수와 냉면이 덤으로 나오고, 칼국수를 시키면 냉면과 보리밥이 서비스다. 어찌 됐든 3종 세트인 재밌는 메뉴랄 수 밖에!
 
부지런히 음식을 준비하면서 오가는 손님들을 향해 쉴 새 없이 말을 건넨다. '슬라맛 다땅~ 카오루짱! 오이시~' 신기해하는 나를 보며 주인이 말한다. “우린 척 보면 어느 나라인지 단박에 알 수 있지, 저 손님은 인도네시아 사람이야. 여긴 일본인들이 제일 많이 오니까 무조건 카오루짱 이라고 부르는 거고. 하하핫”
 
어쩜 그리 잘 아시느냐 물어봤다. 남대문시장에서 음식 장사를 몇십 년 하다 보면 그깟 구분쯤이야 식은 죽 먹기란다. 세상이 바뀌어 동남아와 중동에서 여행 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해서 늦은 나이에 배우게 된 외국어라며, 나로선 도저히 흉내도 힘든 태국, 인도네시아 말로 손님을 불러 세웠다.
 
남대문시장 칼국수 골목의 비닐 출입문(왼쪽). 오전임에도 손님들로 북적인다. 즉석에서 만들어 나온 보리밥(찰밥), 냉면, 칼국수 3종 세트(오른쪽). [사진 홍미옥]

남대문시장 칼국수 골목의 비닐 출입문(왼쪽). 오전임에도 손님들로 북적인다. 즉석에서 만들어 나온 보리밥(찰밥), 냉면, 칼국수 3종 세트(오른쪽). [사진 홍미옥]

 
3종 세트의 음식량만큼이나 놀랍고 신기했다. 음식을 내놓는데에도 나름의 노하우가 숨어 있다고 했다. 아가씨들이 오면 양을 조금 내놓고, 청년들은 물론 푸짐하게 내어준다. 인상적인 건 어르신 손님의 경우였다. 특히 남자 어르신은 혼자 사는 경우가 다반사라 남은 밥을 싸 갈 수 있을 정도로 푸짐하게 내어놓는단다.
 
내친김에 사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새벽부터 시장에 나와 자식들 가르치는 재미로 살았고 아들, 딸이 유명대학을 나와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어 뿌듯하다고. 하지만 오십에 쓰러져 25년간 투병생활 중인 남편을 두고 나설 때면 맘이 아프다고 한다. 그래도 외국어도 배우고 하루하루가 즐겁다며 웃음을 날린다. 단돈 6000원에 칼국수 3종 세트가 아니라 인생 3종 세트를 맛본 듯했다.
 
토요일 남대문꽃시장엔 꽃 풍년
몇 년 전부터 내가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가는 곳이 있다. 규모는 여타 꽃시장보다 훨씬 작지만 알차고 향기로운 곳, 남대문 꽃시장이다. 시장이 문 닫는 오후 3시쯤이나 토요일 점심 무렵에 가는 게 좋다. 거짓말 좀 보태서 시중의 멋스러운 꽃집, '플라워샵'이라고 쓰여있는 가게의 십 분의 일 가격이면 한 다발을 살 수 있으니 완전 득템이다. 몇 년을 다녔지만 단골집이라곤 없는지라 오늘도 킁킁 향내를 맡아가며 꽃집 사이를 걷는다.
 
토요일 오후의 남대문 꽃시장. 규모는 작지만 다양한 꽃을 볼 수 있다. [사진 홍미옥]

토요일 오후의 남대문 꽃시장. 규모는 작지만 다양한 꽃을 볼 수 있다. [사진 홍미옥]

 
"다브로 빠좔라바치!" ('어서 오세요'의 러시아어)
엥, 이건 또 뭔 글로벌스타일? 극강의 미모를 뽐내고 있는 분홍작약을 쌓아두고 있는 꽃집 주인이 하는 말이다. 한눈에도 러시아 쪽 미녀가 작약을 눈여겨보고 있다. 그러자 우리 멋진 주인장 벌써 러시아어가 나오기 시작한다. 물론 그다음엔 만국의 공통어인 바디랭귀지가 오갔고, 분홍작약 두 다발은 파란 눈의 미녀에게 안겼다.
 
사실 뻔질나게 꽃시장을 드나들어도 대부분이 외래어인 꽃 이름을 외우는 건 정말 어렵다. 장미라고 해도 온갖 이름들이 있기 때문에 그냥 분홍, 빨강, 노랑 등 색으로만 구별하는 수준이다. 우리의 멋쟁이 꽃집 아저씨처럼 발음도 어려운 러시아어가 자연스레 나오는 걸 보니 덩달아 흐뭇해졌다.
 
요즘엔 친구들을 만나면 하는 말이 있다. 우린 모두 지시대명사 증후군 환자들이라고. 말은 해야겠는데 도무지 단어가 생각이 나질 않아서 '그거, 거시기, 거 뭐야 ‘등등으로 대화를 시작하곤 하는 것이다. 우스운 건 중년의 친구들은 그 뜻을 모조리 이해하는 통에 되묻지 않는다. 우리말도 잊어버릴 판국에 외국어는 가당키나 하냐면서 자신을 위로한다. 구글 번역기가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면서.
 
언젠가 읽은 책 구절에 이런 게 있었다. ‘세상이 무력하고 살기 싫어지거나 용기를 잃을 때면 새벽시장엘 가보라고, 치열하고 분주한 삶을 보며 용기를 가지라고.’ 새벽까지 갈 것도 없이 위의 두 곳만 가도 뒤늦은 향학열이 불타오를지도 모르겠다. 꽃시장의 대목인 5월이 지나고 꽃값이 저렴해질 무렵이면 슬슬 꽃시장 나들이를 가야겠다. 이번엔 어렵더라도 꽃 이름 하나쯤은 외워가는 성의도 함께!
 
홍미옥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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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미옥 홍미옥 스마트폰 그림작가 필진

[홍미옥의 폰으로 그린 세상] 둘도 없는 친구인 스마트폰과 함께 세상 이야기를 그리는 중년 주부.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중년도 아직 늦지 않았음을 그림을 통해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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