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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끼 줍쇼’는 없다… '감정 노동' 끝판왕 통계 조사요원

중앙일보 2019.05.12 05:30
‘지정통계 작성을 위한 조사 또는 확인에 있어 관계 자료 제출을 요구받거나 질문을 받은 자는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해야 한다.’
 
통계법 제26조 3항 내용이다. 이른바 ‘통계에 응답할 의무’다. 통계법 41조에 따르면 이를 위반할 경우 1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 하지만 응답률은 2010년 80.6%→2015년 75.4%→2017년 72.5%로 꾸준히 하락세다. 통계청이 고민에 빠진 이유다. 조사 거부에 원칙대로 과태료를 물리자니 국민 반발이 우려되고, 그렇다고 떨어지는 응답률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도 없어서다.  
 
통계 조사 ‘문전박대’ 시대 최전선에 선 통계 조사 요원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통계청은 1984년부터 통계조사 현장에서 뛰어온 ‘베테랑’ 박귀순(53) 서울사무소 고용팀장을 추천했다. 그의 조사 일지를 들여다봤다. (※기사는 박 팀장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했습니다.)
‘한 끼 줍쇼’는 없다
JTBC 예능 프로그램 '한 끼 줍쇼' 출연진이 무작위로 고른 한 집 문을 두드리고 있다. [JTBC]

JTBC 예능 프로그램 '한 끼 줍쇼' 출연진이 무작위로 고른 한 집 문을 두드리고 있다. [JTBC]

예능 프로그램 ‘한 끼 줍쇼’를 즐겨본다. 연예인이 모르는 집 문을 두드려 밥을 얻어먹으며 평범한 사람과 얘기를 주고받는 구성이 정겨워서다. 어쩌면, 나의 일상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조사하느라 고생 많다며 집에 들어와 차 한잔, 밥 한 끼 하고 가란 얘기라도 건네는 경우는 추억이 됐다.

 
체감상 5~6년쯤 전부터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먼저,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1인 가구가 늘면서 조사 요원이 방문했을 때 집을 비운 경우가 많다. 당연히 응답자를 만나기 위해 늦게까지 기다리는 경우가 늘었다. 그래도 못 만나면 주말 조사도 불사한다. 5월 4~6일 ‘황금연휴’ 때도 조사를 나갔다.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다. “왜 개인 생활을 꼬치꼬치 캐묻냐” “나라가 내게 해준 게 뭔데 이런 정보까지 제출해야 하느냐” “세금 더 받아내려고 조사하는 것 아니냐”고 반응하는 가구가 부쩍 늘었다. 귀찮다며 민원을 내 경찰서를 들락날락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니 옛날엔 조사하다 친해져 조사를 마치고도 가끔 만나 친구처럼 지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 끼 줍쇼’가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감정노동자
서울의 한 가구를 방문해 통계 조사를 하고 있는 박귀순 통계청 서울사무소 고용팀장. [통계청]

서울의 한 가구를 방문해 통계 조사를 하고 있는 박귀순 통계청 서울사무소 고용팀장. [통계청]

‘텔레마케터’를 대표적인 감정 노동자로 꼽는다. 집집이 문을 두드려 응답자를 설득시켜야 하는 통계 조사 요원도 ‘문전박대+욕’ 세트를 다반사로 겪는다. 특히 조사원 대부분이 여성이라 겪는 고충이 많다. 속옷 차림 남성이 일단 집으로 들어오라고 할 땐 덜컥 겁부터 난다. 문자 메시지나 카카오톡 메신저를 통해 “좀 더 자주 와달라” “따로 한번 만나자”며 성희롱하는 경우도 있다. 욕? “한 번만 더 찾아오면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이루 말 못한다. 중요한 조사가 몰린 매달 15일을 앞두고선 스트레스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이룰 정도다.

 
내 일이란 게 칼같이 조사만 하고 빠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통계법상 응답할 의무가 있다지만 반은 ‘영업’이다. 한 번은 조사차 방문했는데 원룸 주인이 마침 이삿짐을 옮기고 있더라. 같이 팔 걷어붙이고 짐 옮기는 데 손을 보탰다. 어르신이 쓰러질 것 같아서 병원에 데려간 적도 많다. 할머니가 손녀를 보느라 고생하길래 같이 손녀를 업어주고 설거지를 해준 적도 있다. 때론 경조사까지 챙긴다.  
설득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조사에 불응하는 가구를 설득하기까지 잡는 평균 기간이 ‘6개월’이다. 뒤집어 말하면 6개월 동안 설득에 공을 들여야 한다는 얘기다. 다른 가구로 바꾸면 되지 않냐고? 나라에서 정한 표본이라 다른 가구로 대체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표본으로 정해지면 무조건 설득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설득의 매뉴얼’이 있다. 조사원이 먼저 가서 설득하고, 안 될 경우 한 달씩 시차를 두고 팀장, 소장 순으로 ‘소방수’를 투입한다. 한 번에 설득하는 건 꿈도 못 꾼다. 무조건 듣는다(경청)→“저라도 같은 심정일 것 같아요” 얘기한다(공감)→“여러모로 바쁘실 텐데 응답하기 쉽지 않겠습니다”를 반복한다(이해) 3단계를 거친 뒤 설득에 들어간다. “응답 내용은 철저히 비밀을 보장하고 통계 목적 이외엔 사용하지 않는다”고 이성에 호소하는 게 마지막이다.

 
설득에 성공했을 때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가끔 응답자가 “중요한 일인데 제가 하겠다. 답례도 필요 없다”며 적극적으로 응해올 땐 고마움이 밀려온다. 자녀와 함께 빼곡히 작성해 온 가계부를 받아들 때면 ‘아, 이게 살아있는 통계구나’ 싶다.

나는 통계 조사원이다
박귀순 팀장(왼쪽 셋째)과 통계청 서울사무소 조사요원들. [통계청]

박귀순 팀장(왼쪽 셋째)과 통계청 서울사무소 조사요원들. [통계청]

가끔 응답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내가 응답한다 하더라도 답례(매달 5만~6만5000원)가 너무 박한 수준이다. 조사에 들어가는 노력도 노력이지만 응답자로선 수입ㆍ지출 같은 민감한 내용을 공개하는 건데 그에 대한 대가로 결코 많은 수준이 아니다. 조사 요원도 최선을 다할 테니 응답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답례 수준, 혹은 혜택을 늘렸으면 한다.

 
미래의 응답자에게 바란다. 언젠가 당신에게도 조사 요원이 찾아갈지 모른다. 그때 부디, 제발 조사에 응해달라. 통계는 정부 정책의 ‘출발점’이다. 당신이 내는 세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 파악하는 기초작업에 참여해 달라. 자신을 위한 기부라고 생각하면 낫다. “조사원이냐” “공무원 맞냐”고 의심하지 않으셔도 된다. 나는 당신이 읽는 통계를 만들기 위해 현장에서 뛰는 진짜 공무원이니까.

 
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김기환의 나공
[나공]은 “나는 공무원이다”의 준말입니다. 세종시 경제 부처를 중심으로 세금 아깝지 않게 뛰는 공무원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각 분야에서 묵묵히 일하며 헌신하는 이들의 고충과 애환, 보람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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