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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록 남기고 안락사 택하는 작가

중앙선데이 2019.05.11 00:21 635호 20면 지면보기
굿바이, 헤이세이

굿바이, 헤이세이

굿바이, 헤이세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서혜영 옮김
토마토 출판사
 
‘그가 성행위를 싫어하는 탓에 나는 정기적으로 여성용 섹스토이를 사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메종 마르지엘라 코트를 입고 아이폰과 톰 브라운 지갑, 아멕스카드를 사용하면서 죽음을 꿈꾸는 29세 초식남과 욕망에 충실한 동갑내기 여자의 연애담이라니. 헤이세이 시대의 끝에 나온 소설 『굿바이, 헤이세이』는 어쩌면 헤이세이를 대표해온 작가 하루키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숲』으로 시작해 영드 ‘블랙미러’로 끝나는 걸 보니, 제목 그대로 지금 시대에 고하는 작별인사다. 안락사가 합법화된 가상의 일본에서 안락사를 준비하는 ‘헤이세이군’의 이야기는 가벼운 연애소설인 척 현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거대한 메타포로 비추고 있다.
 
연호 ‘헤이세이(平成)’와 한자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헤이세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스타작가 히토나리(平成)는 헤이세이 시대의 종언에 발맞춰 안락사를 계획한다. 그는 안락사를 반대하는 나에게 자신의 과거 디지털 기록을 딥러닝한 AI 스피커를 남기고 사라진다. 남겨진 나는 그의 생사 여부를 굳이 모를 수 있는 것이다.  
 
젊은 사회학자인 작가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안락사라는 민감한 이슈를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를만한 문학적 성취로 승화시켰다. 할머니의 고통스러운 말년을 계기로 ‘권리로서의 죽음’을 생각하게 됐다는 그는 논문보다 소설을 택했다. 하루키가 『1Q84』의 ‘헤이세이 시대 최고의 소설’ 선정 기념 인터뷰에서 사회적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보다 이야기의 힘을 강조한 것을 보란 듯이 실천했달까.
 
‘이 어두운 방 안에서는 언제 헤이세이가 끝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살아서도 타인과 마주하지 않게 된 시대, 사랑하던 사람과 디지털로 영원히 소통할 수 있다면. 작가가 꿈꾸는 ‘헤이세이 이후’는 과연 희망일까 슬픔일까. 근미래 디스토피아를 소름 끼치게 묘사한 ‘블랙미러’에서 죽은 남편을 대신하는 AI 로봇을 주문하는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뿐 아니라 누군가를 추억할 권리까지 생각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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