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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가정의 달에 ‘극단 선택’…지자체장이 뛰어야

중앙일보 2019.05.09 00:16 종합 28면 지면보기
백종우 경희대 의대 교수 중앙자살예방센터장

백종우 경희대 의대 교수 중앙자살예방센터장

‘가정의 달’이자 ‘신록의 계절’인 5월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통계가 있다. 통계청의 2017년 월별 자살률에 따르면 5월이 1158명으로 가장 많았다. 자살률은 대체로 3월부터 증가해 5월에 최고치에 이른다.
 
봄철의 자살률 증가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일조량이 증가하면서 우울증 발병과 재발이 흔해 자살률 증가에 영향을 준다. 학교와 직장에 새로 적응해야 하고 구직 등 여러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시기다. 특히 생활이 힘든 기초생활수급자의 자격변동시기가 봄이라 자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2017년에만 1만2463명의 생명을 안타깝게 자살로 잃었다. 사망자 20명 중 1명의 사망 원인이 자살이다. 10~3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고, 자살 사망자는 40~50대에 가장 많고, 10만 명당 자살률은 65세 이상이 가장 높다. 자살은 이제 모든 연령대에 걸친 문제다.
 
왜 그들은 자살을 생각할까. 지난해 12월 31일 우리 곁을 떠난 고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교수는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는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느낄 때 자살을 시도하는 것일 뿐 결코 죽음 그 자체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자살을 생각하는 이유에는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이 있다. 지난해 충북 증평 모녀 사건의 경우도 가장을 잃고 자살 유가족이 된 후 급격히 위기에 빠졌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일본 도쿄에서 벌어졌다면 어떻게 했을까. 자살 유가족을 최초로 만난 경찰은 유가족 서비스 안내문을 전달하는 것이 의무다. 미국 뉴욕이었다면 외인사(外因死)를 조사하는 검시관이 먼저 유족을 만난다. 이어서 행정·의료·복지 분야 공무원 수십명이 전문가와 함께 모여 대책을 찾는다. 핀란드의 경우 정신건강전문가가 모든 자살 유가족을 만나 위로하고 고충을 경청하고 이를 기반으로 자살예방대책을 세워 자살률을 절반 이하로 낮췄다. 낮은 자살률은 체계적 시스템의 결과다.
 
한국도 2018년 1월 ‘국가 자살예방 행동계획’을 발표하고 예방체계가 속속 마련되고 있다. 전화 ‘1393’ 번을 누르면 24시간 자살예방 전화 상담이 가능하다. 자살을 시도한 사람은 응급실 기반 사례관리를 통해 지원받을 수 있다. 관내 정신건강복지센터를 찾아가면 사례관리를 통해 의료복지서비스를 연결해준다. 올해부터 자살 유가족은 ‘위기 가구’로 지정돼 지원받을 수 있다. 이미 100만명이 ‘보고·듣고·말하기 한국형 자살예방 교육’을 수료했다. 그렇지만 이런 서비스도 위험에 빠진 사람과 ‘연결’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다.
 
자살예방법 3조 1항에는 ‘국민은 자살 위험에 노출되거나 스스로 노출됐다고 판단될 경우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 도움을 요청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생사의 기로에 놓인 국민이 요청할 수 있는 당당한 권리다. 법이 정한 권리가 행사되도록 하려면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 있는 리더의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비용 대비 효과가 가장 높은 자살예방대책 중 하나가 리더의 관심과 행동이라고 강조했다. 단체장이 적극적으로 자살예방 노력을 해온 서울 노원·동대문·성북구 등에서는 자살률이 현저하게 감소했다. 이들 단체장은 자살예방 교육을 끝까지 듣고 관련 회의를 주재하고 시민들에게 “힘드실 때 도움을 요청하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수시로 전했다. 그러자 민관이 함께 자살예방을 위해 움직였고 구체적 성과로 나타났다.
 
가정·직장·학교에서 자살위험에 빠진 사람이 보내는 신호를 ‘보고’ 아픔을 ‘듣고’ 그들과 ‘말하기’로 손을 잡아주면 자살은 예방할 수 있다. 가정과 사회가 극단적 선택을 막고 ‘살만한 사회’를 만들어 모두가 찬란한 5월의 신록을 만끽하면 좋겠다.
 
백종우 경희대 의대 교수·중앙자살예방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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