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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현철 논설위원이 간다] 74조 자금 모은 580개 사모펀드, 기업 인수 ‘호시탐탐’

중앙일보 2019.05.09 00:02 종합 24면 지면보기
M&A 시장 강자 된 사모펀드
“메기인 줄 알았는데 고래였다.”
 
지난 3일 롯데카드와 롯데손해보험 인수 우선협상자로 사모펀드인 한앤컴퍼니와 JKL파트너스가 선정됐다는 소식에 금융권 관계자가 한 말이다. 금융권에선 당초 금융이라는 업종의 특성을 아는 우리금융과 하나금융 등 쟁쟁한 금융지주사들이 유력할 거라고 내다봤었다. 비은행 부문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두 회사가 롯데 계열 금융사 인수로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것이란 얘기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연 결과는 달랐다. 금융 경험이 없는 한앤컴퍼니는 인수비용으로 1조4000원대를 써내고 롯데그룹이 요구한 100% 고용보장도 수용하며 1조 원대를 써낸 하나금융을 이겼다. 국내 최대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와 연합한 우리금융도 가뿐히 제쳤다. JKL파트너스는 MBK파트너스와 한앤컴퍼니를 제치고 롯데손보 지분 58.5%를 약 4000억원에 인수했다. 인수 합병(M&A)에 응모한 회사 수나, 낙찰 회사 수에서도 사모펀드가 금융권을 압도한 셈이다. 한 대형 금융지주 관계자는 “일반기업도 아닌 금융회사를 사모펀드들이 독식한 건 사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런 경향이 갑자기 나타난 건 아니다. 최근 2~3년간 대형 인수 합병에선 기업이나 돈 많은 개인보다 사모펀드가 부쩍 강세를 보여왔다. MBK파트너스의 웅진·오렌지라이프 인수, 연합파트너스의 STX엔진 인수, 맥커리코리아오퍼튜니티운용의 ADT캡스 지분 인수, 스톤브리지캐피탈의 애경산업 지분 인수 등이 대표적이다. 매일경제신문이 올해 들어 본계약이 체결되거나 우선협상대상자가 선정된 1000억원 이상 국내 기업 M&A를 조사한 결과에서도 18건 중 11건의 인수자가 사모펀드였다. 이들이 인수에 들인 금액도 전체의 절반이 넘는 6조 2889억원에 달했다. 2004년 이른바 ‘론스타 사태’ 이후 태어난 사모펀드가 명실공히 대기업 M&A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업계에선 두 가지 요인 때문으로 분석한다. 돈이 몰리고 기업 매물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경식 금융감독원 자산운용감독국장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반적으로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 투자 수익률이 떨어진 데다 사모펀드의 운용 경험이 쌓이면서 수익률이 훨씬 높다는 걸 알게 된 기관들이 앞다퉈 투자를 늘리고 있다”고 전했다. 대표적으로 국민연금은 올해 사상 최대인 2조4000억원을 사모펀드에 출자할 계획이다. 교직원공제회 역시 사상 최대인 8000억원을, KDB산업은행과 한국성장금융은 각각 6400억원과 3118억원을 출자할 예정이다. 우정사업본부(4000억원)와 군인공제회(900억원), 사학연금공단(2000억원)과 행정공제회(1200억원)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죽을 쑤고 있는 공모펀드에 실망한 개인들의 참여도 늘고 있다. 공모펀드보다 사모펀드가 더 많아진 주식시장 상황이 이를 대변한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지금 강남에서 개인 고객을 대상으로 사모펀드를 모아도 은행 하나가 하루이틀새 수백억은 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기업 매물이 점차 많아지는 것도 사모펀드의 활동 영역을 넓히는 주요한 요인이다. 창업자와 아들 세대가 은퇴하면서 경영에 관심이 없는 3세들이 지분을 정리하거나 비핵심 사업들을 정리하고 있다. 주식시장 등 자본시장이 투명해지면서 자본이나 능력이 부족한 오너들이 제 발로 물러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모펀드 업계 관계자는 “몇 년 전 삼성의 계열사 정리에서 보듯 한국의 자본주의가 성숙하면서 비핵심사업을 매각하는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며 “예전 같으면 다른 기업이 대개 인수했을 테지만 지금은 법적 규제와 불투명한 사업적 전망 때문에 극도로 신중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과거 은행 돈을 빌려 타기업을 인수했던 기업 입장에서도 사모펀드는 괜찮은 선택이다. 이자는 받지 않고 투자 리스크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실제 미래에셋그룹PE는 SK브로드밴드와 티브로드 합병 때 4000억원을 투자했다. 신세계그룹의 통합 온라인 플랫폼 쓱닷컴 출범에도 어피니티에퀴티파트너스와 BRV벤처스가 1조원을 투자했다. SK그룹의 11번가 분사 과정에서도 H&Q코리아가 5000억원을 공급했다. 한마디로 넘쳐나는 돈과 매물이 사모펀드의 호황을 이끄는 셈이다.
 
사실 제도적으로 보면 사모펀드 도입 이후 바뀐 게 거의 없다. 2015년 등록절차를 일부 완화해 사모펀드 수가 많이 늘어나는 등 부분적 제도 개선이 이뤄졌을 뿐이다. 정부가 산업 육성을 한다며 큰돈을 들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사모펀드 산업이 크게 성장한 것을 두고 당국과 업계 모두 “시장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해외 사모펀드인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하며 생긴 ‘론스타 사태’도 국내 사모펀드 육성의 계기가 됐다. 당시 ‘금융자본이 아닌 론스타가 은행을 인수해도 되느냐’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할 때 주가를 조작했다’는 등의 논란이 있었지만, 국내엔 외환은행을 인수할 주체가 전혀 없었다. 은행들은 구조조정의 칼바람 속에서 각자도생에 바빴고, 증권사들도 외환위기의 후폭풍을 견디기에 바빴다. 은행을 인수할 만큼 돈이 많은 개인도 없었다. 은행을 포함한 기업 M&A는 자연스레 외국 사모펀드의 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강영수 금융위 자산운용과장은 “15년 만에 굳건히 자리 잡은 사모펀드 도입은 시장이 원하고 바라는 방향으로 길을 터주는 게 최상의 금융정책이라는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현재 사모펀드는 확장일로를 걷고 있다. 도입 초기에는 MBK파트너스 등 소수만이 참여했지만 갈수록 양과 질 양면에서 쑥쑥 크고 있다. 2011년 181개였던 사모펀드 숫자는 지난해 말 583개로, 출자약정액은 같은 기간 중 31조8000억원에서 74조5000억원으로 확대됐다. 지난해 말 현재 이들의 투자이행비율은 74.7%에 달하고 3000억원 이상의 대형 사모펀드도 58개에 이른다. 이들의 전략도 바이아웃(기업 인수 후 매각), 기업 재무안정, 창업벤처전문, 해외자원개발 등으로 다양하다. “일본 호주와 더불어 아시아에서 바이아웃 거래를 할 수 있는 3대 국가가 됐다”고 할 정도다.
 
국내에서도 “사모펀드 없이는 대형 M&A를 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작은 올챙이로 시작했던 사모펀드가 이제 금융시장의 메기를 넘어 아시아 시장의 고래로 성장한 셈이다. 이철민 VIG파트너스 대표는 “예전에는 매물로 나온 기업을 다른 기업이나 돈 많은 개인이 아니면 살 수 없었지만 지금은 사모펀드가 활성화돼 자발적인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구조조정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며 “잘하면 메기가 되겠거니 했는데 고래가 됐다”고 말했다.
 
나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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