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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의 시시각각] 한일의 슈베르트 협연을 꿈꾸며

중앙일보 2019.05.08 00:15 종합 30면 지면보기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2007년 1월 도쿄의 젠닛쿠(全日空)호텔 지하 1층 연회장으로 기억한다. 바로 옆 산토리홀에서 열린 ‘한·중·일 우정의 가교 콘서트’가 끝난 뒤의 비공개 리셉션. 깜짝 놀랄 해프닝이 있었다. 이날 비올라 협연에 나섰던 나루히토(德仁) 왕세자(현 일왕)가 연단에 올라 즉석연설을 했다. “일반 행사에선 연설을 않는다”는 일 왕실의 불문율을 깬 것이었다. 파격은 이어졌다. 리셉션이 끝나갈 무렵 왕세자는 갑자기 비올라를 들고 무대에 올랐다. 그리곤 이날 생일을 맞은 정명훈을 축하하는 깜짝 공연을 했다.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미래의 일왕’이 300명의 일반인 앞에서 한국인과 이런 모습을 보인 건 아마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게다. 참석자들은 놀랐고, 일 왕실은 경악했다.
 

일왕과 정명훈이 나눴던 ‘먼’ 약속
광어·가자미눈 양국 정부로는 난망
민간이 ‘바른 눈’의 벽돌 쌓아가길

비화를 들었다. 당시 리허설 과정에서 정명훈과 왕세자는 서로의 마음을 열었다. 하루는 왕세자가 정명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도 언젠간 한국에 갈 수 있겠죠.” 그뿐 아니다. 2013년 초 일 왕실 행사에 참석한 모 인사에게 왕세자는 이런 말을 훅 던졌다고 한다. “슈베르트는 어떻게 돼 가나요. 언제 합니까.” 이 인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2007년 협연 당시 왕세자와 정명훈이 슈베르트의 곡을 공연하면서, “다음번 한국에서 협연을 하게 되면 슈베르트의 이 곡으로 하자”며 특정 곡을 지목했었기 때문이다. 왕세자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소망은 박근혜·문재인, 또 한쪽으론 아베라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에 막혀 성사되지 않았다. 3류 정치의 한계다.
 
요즘 우리 일각에선 한일관계 위기 타개책으로 일왕의 방한을 거론한다. 아베와는 달리 주변국과의 화해를 중시한다는 이유에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장 그걸 성사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일왕과 왕세자는 차원이 다르다. 절차·파급효과·경호 등 모든 게 100% 해결돼야만 움직일 공간이 생긴다. 일 왕실은 결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상황이 개선돼야만 움직일지 말지 고민한다. 1992년 아키히토 일왕이 중국을 찾아 머리를 숙였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는 혹독한 비판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의 반일, 일본의 반한 분위기론 어림도 없다. 만에 하나, 덜컥 온다고 해도 서로에게 부담이다. 오히려 악화될 수 있다.
 
‘850년 피의 역사’로 불리는 아일랜드와 영국 관계를 보자. 양국의 역사적 갈등과 반목은 2011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일랜드 방문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게 단기간에 이뤄진 게 아니었다. 1998년 평화협정을 맺고, 약속을 지켰다. 토니 블레어 영 총리는 “(과거) 아일랜드인들의 죽음은 오늘날까지 양국 모두에 고통으로 남았다”고 솔직히 사과했다. 아일랜드도 평가할 건 평가했다. 시계추를 과거로 돌리지 않았다. 경제 위기 때는 공조했다. 정부나 민간 할 없이 각종 행사를 꾸준이 개최했다. 벽돌 한 장 한 장 쌓듯 신뢰와 배려 쌓기를 했다. 아일랜드인은 환영할 준비가, 영 국왕은 사과를 할 준비가 됐다. 그런 후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일랜드의 상징색 녹색 코트를 입고 아일랜드를 찾았다. 대성공이었다. 아일랜드 총리는 3년 후 답방했다. 시간은 걸렸지만, 서로가 확실한 정공법을 택해 뒷말이 안 났다.
 
우리 정부와 아베 정부는 이런 비전과 전략이 있는가. 벽돌을 쌓고 있는가, 지하실을 파고 있는가. 레이와 시대가 출범했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해보자는 목소리만 들리지, 뭘 하나 제대로 해보려는 노력을 않는다. 과거만 따지는 ‘광어눈 청와대’나, 미래만 보자는 ‘가자미눈 아베 정권’이나 기대난망이다. 이 둘로는 불신을 거둘 수 없다. 그렇다고 정공법을 포기할 순 없다. 정부가 못하면 ‘바른 눈’을 갖는 민간이라도 꾸준히 벽돌을 쌓아가야 한다. 언젠가는 실현될지 모를 나루히토-정명훈의 슈베르트 협연을 꿈꾸며 말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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