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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상인’의 수전노, 16세기 유럽만의 얘기일까

중앙일보 2019.05.08 00:03 종합 23면 지면보기
‘베니스의 상인’으로 오랜만에 뮤지컬 연출에 나선 박근형은 ’이 작품 속 샤일록을 보면 힘든 세월 최선을 다해 사신 우리네 부모님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베니스의 상인’으로 오랜만에 뮤지컬 연출에 나선 박근형은 ’이 작품 속 샤일록을 보면 힘든 세월 최선을 다해 사신 우리네 부모님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연출가 박근형(56)이 뮤지컬 연출에 나선다. 서울시뮤지컬단이 오는 28일부터 6월 16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하는 ‘베니스의 상인’의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청춘예찬’ ‘경숙이 경숙 아버지’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등을 통해 한국 사회 동시대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그가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반목했던 16세기 유럽의 이야기에 도전한다. 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그는 ‘박근형표 베니스의 상인’에 대해 “‘우리 시대 샤일록은 누구일까’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셰익스피어 뮤지컬 연출 박근형
돈에 얽매 사는 우리 시대 희비극
스타 배우 박해일·고수희 키워내

샤일록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불쌍하다”는 쪽이다. 원작인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은 탐욕과 악의 상징인 고리대금업자다. 그러나 그는 샤일록을 “유대인으로 당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천박하고 잔인하지만 돈만이 자기를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억척같이 산 사람”으로 해석했다. 또 “법이 정한 한도 내에서 누구든 부를 추구하고 누릴 수 있지 않냐. 엄밀히 말하면 살 1파운드를 담보로 돈을 빌린 안토니오와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살을 가져가라’고 판결한 포샤가 샤일록을 속인 것이 아니냐”며 “그런 다양한 생각을 관객들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열아홉 살 때인 1982년 공연 포스터를 붙이며 대학로에 발을 들인 그는 1999년 작·연출을 맡아 초연한 ‘청춘예찬’으로 연극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백상예술대상 희곡상, 동아연극상 작품상·희곡상, 평론가협회 최우수 작품상 등을 휩쓸었고, 초연 배우였던 박해일·고수희 등도 유명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만주전선’ ‘너무 놀라지 마라’ ‘쥐’ ‘선데이서울’ 등이 꼽힌다. 모두 연극이었다.
 
그에게 뮤지컬 작업은 그만큼 드문 일이었다. 그동안 그가 연출한 뮤지컬은 웹툰을 원작으로 한 ‘위대한 캣츠비’, 세계대백제전 수상공연 ‘사마 이야기’, 여수엑스포 해상공연 ‘바다의 소녀’ 정도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한진섭 서울시뮤지컬단 단장에게 ‘베니스의 상인’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 ‘뮤지컬 경험이 많지 않다’고 걱정했더니, 한 단장이 ‘뮤지컬도 크게 보면 연극의 한 분야 아니냐’고 하더라”면서 뮤지컬 연출에 대한 자신감을 에둘러 표현했다.
 
뮤지컬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 역 김수용(왼쪽)과 안토니오 역 주민진. [사진 세종문화회관]

뮤지컬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 역 김수용(왼쪽)과 안토니오 역 주민진. [사진 세종문화회관]

그가 추구하는 뮤지컬은 “오랜 여운이 남는 작품, 특히 좋은 음악이 관객들 가슴 속에 남는 작품”이다. 이번 ‘베니스의 상인’ 음악은 뮤지컬 ‘광화문 연가’ ‘미인’ ‘꾿빠이 이상’ ‘록키 호러 쇼’ 등에 참여했던 김성수 음악감독이 작사·작곡을 했다.  
 
그는 다소 즉흥적인 연출 스타일로 유명하다. 끊임없이 대본을 수정하는 바람에 첫 공연과 마지막 공연의 내용이 다르다, 배우들도 극의 결말을 모른 채 무대에 오른다, 인터미션 때 대사가 다 바뀐다 식의 ‘괴담’이 떠돌 정도다. 이에 대해 그는 “요새는 안 그런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큰 틀은 짜인 대로 하지만 각 배우의 특성에 맞도록 대사와 장면을 수정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또 “배우들이 직접 자신에게 맞는 대사를 생각해와서 고칠 때도 있다.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으면 결과가 좋아진다”고 말했다.
 
그를 만난 자리에서 ‘블랙리스트’ 이야기를 빼놓을 순 없었다. 그는 박근혜 정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발단이 된 인물이다. 2013년 그가 각색·연출한 연극 ‘개구리’가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하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이후 각종 정부 지원에서 배제됐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와 관련자 처벌 수위를 놓고 문화예술계가 전례 없이 시끄러웠지만 정작 그는 본업인 연극 연출과 학교 수업(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이외의 일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는 “내 유일한 정치 활동은 투표”라며 자신에게 정치색을 입히는 데 선을 그었다. “블랙리스트 사태는 이제 잘 마무리된 것 같다. ‘개구리’의 재공연할 생각도 없다”고 못 박았다.
 
그에게 예술가로서 꿈꾸는 지향점을 물었다. 그는 “어릴 때 꿈은 독립군이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만화책을 보고 독립군이 되겠다고 결심했는데, 학교 가서 공부를 해보니 우리나라는 이미 해방이 돼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우린 여전히 독립이 안 된 상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독립군이 되겠다”고 했다. 그의 목소리는 밋밋하리만치 차분했지만 담긴 의미는 그의 작품 스타일만큼이나 날카로웠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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