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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범죄수사 돕는 ‘시체농장’ 조성 중...법의학 더 진화할까

중앙일보 2019.05.06 18:39
영국 군 당국과 허더스필드대 연구진 등 법의학계가 영국 내에 이른바 ‘시체농장(body farm)’을 열 준비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2일(이하 현지시각) 영국 정부에 정보공개를 청구하고 확보한 문서를 토대로 “영국 국방부 소유의 부지에 시체농장 관련 시설이 지어지고 있다”며 “이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는 관계자들은 시체농장이 올해 안에 개소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 법의학계와 군 당국이 이른바 시체농장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고 국제학술지 '네이처'가 보도했다. 시체농장의 공식명칭은 법의인류학 연구소다. 사진은 세계 최초의 법의인류학연구소인 테네시 인류학연구소 연구원들이 시체를 야외에 두고 부패 실험을 하는 모습. [사진 테네시 법의인류학연구소]

영국 법의학계와 군 당국이 이른바 시체농장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고 국제학술지 '네이처'가 보도했다. 시체농장의 공식명칭은 법의인류학 연구소다. 사진은 세계 최초의 법의인류학연구소인 테네시 인류학연구소 연구원들이 시체를 야외에 두고 부패 실험을 하는 모습. [사진 테네시 법의인류학연구소]

범죄수사 돕는 ‘야외 법의학 실험실’...세계 법의학 트렌드
 
시체 농장은 사람의 사체를 다양한 환경에 노출해두고 그 부패 과정을 면밀히 관찰해 범죄 수사에 도움을 주는 일종의 ‘야외 법의학 실험실’이다. 국제적으로는 ‘법의인류학 연구소(FAC)’로 불린다. 1982년 윌리엄 배스 미국 테네시대 법의학과 교수가 처음 문을 연 이래 현재 미국에만 총 7개의 법의인류학 연구소가 운영되고 있다.

 
전 국과수 중앙법의학센터장을 지낸 정낙은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교수는 “사람의 사체는 그것이 처한 환경뿐만 아니라 사체 주인의 생전 건강 상태, 체격 등에 따라서도 부패 양상이 달라진다”며 “이 때문에 사체가 처한 것과 비슷한 환경에서 실험을 해보면, 사건 발생 시기 등을 보다 정확히 알 수 있어 범죄수사에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법의인류학 연구소에서는 사체가 부패하는 속도와 양상 등을 관찰해 데이터화한다. 실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같은 데이터를 이용하면 범죄를 수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게 법의학계의 설명이다. 사진은 국방부가 진행한 남북 공동유해발굴 작업에서 발견된 전사자 유해. [사진 국방부]

법의인류학 연구소에서는 사체가 부패하는 속도와 양상 등을 관찰해 데이터화한다. 실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같은 데이터를 이용하면 범죄를 수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게 법의학계의 설명이다. 사진은 국방부가 진행한 남북 공동유해발굴 작업에서 발견된 전사자 유해. [사진 국방부]

하홍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법의관은 “먼저 시체 농장에 마련된 집과 차량 내부, 야외 등에 여러 환경에 사체를 방치해 두고 그 변화 과정을 연구해 데이터를 쌓는다”며 “이 같은 자료가 있으면 비슷한 환경에서 발생한 범죄를 수사할 때 참고로 이용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법의인류학 연구소를 여는 것이 국제 법의학계의 트렌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실제로 네이처에 따르면 호주와 네덜란드에도 이 같은 법의인류학 연구소가 설치돼있으며, 캐나다에는 올해 '시체농장'이 개소할 예정이다. 
 
영국·한국은 법의인류학 연구소 ‘제로’
 
그러나 영국의 경우 이런 필요성에도 윤리적 문제와 용지 확보의 어려움 등 난관으로 아직 '시체농장'이 한 곳도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시체농장 건설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애나 윌리엄스 허더즈필드대 교수는 네이처와의 인터뷰에서 “영국이 법의학과 범죄수사 분야에 있어 뒤처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영국 상원 과학기술위원회 역시 지난주 “영국 법의학은 매우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다”며“보다 전략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지적함에 따라 관계 당국은 법의인류학 연구소 설치를 검토 중인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의 경우 정서적ㆍ입법적 문제 등으로 아직 법의인류학 연구소에 대한 제대로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월 울산시 남구 농수산물도매시장 수산물 소매동 화재 현장에서 합동감식 중인 국과수 요원의 모습. [연합뉴스]

한국의 경우 정서적ㆍ입법적 문제 등으로 아직 법의인류학 연구소에 대한 제대로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월 울산시 남구 농수산물도매시장 수산물 소매동 화재 현장에서 합동감식 중인 국과수 요원의 모습. [연합뉴스]

한국은 아직 이같은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내 법의인류학 연구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박대균 순천향대 의대 교수는 “2009년 2월 제주 애월읍에서 발생한 ‘제주 보육교사 피살사건’의 경우, 10년 가까이 용의자를 찾지 못하다가 피해자가 발견된 농업용 배수로에 실험용 돼지를 두고 부패 정도를 관찰해, 결국 용의자를 특정했다”며 “사람의 사체를 이용하면 범죄수사의 정확도가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사람의 사체를 소중히 여기는 등 문화적 요인으로 한국에서는 법의인류학 연구소 설치가 난관을 겪고 있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미국 테네시대 법의인류학 연구소의 경우 현재 사체 기증 대기자만 1400여명에 이른다”며 “그러나 한국의 경우, 해부를 위해 기증받는 시체는 의대 한 곳당 약 10구 정도”라고 밝혔다. 
 
2009년 발생한 제주 보육교사 피살사건의 용의자는 돼지를 통한 사체 부패 실험을 통해 특정됐다. 사진은 지난해 5월 당시 사건의 유력 용의자 박모(50)씨가 경찰에 압송되고 있는 모습. [사진 뉴시스]

2009년 발생한 제주 보육교사 피살사건의 용의자는 돼지를 통한 사체 부패 실험을 통해 특정됐다. 사진은 지난해 5월 당시 사건의 유력 용의자 박모(50)씨가 경찰에 압송되고 있는 모습. [사진 뉴시스]

더욱이 현행 ‘시체 해부 및 보존에 관한 법률’은 사체를 해부에는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부패 실험에 활용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지 않아, 입법적인 과제도 남아있는 상황이다. 박대균 교수는 “현재 경찰수사연수원 차원에서 체중 60~80㎏급 돼지로 관련 연구를 대체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우선 현실 과학수사를 지원하고 법의인류학 연구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영국이 설치를 추진 중인 법의인류학 연구소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지만, 남부 포턴다운에 위치한 ‘국방과학기술연구소’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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