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본문

주례 없어도 될까? 이젠 결혼식도 '개취존'

중앙일보 2019.05.06 11:00 종합 22면 지면보기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28)
품격과 원칙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결혼식이다. 그러나 격식보다 내용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알뜰혼수’, ‘작은 결혼식’처럼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결혼문화는 정착하기 힘들 것 같다. [사진 pixabay]

품격과 원칙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결혼식이다. 그러나 격식보다 내용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알뜰혼수’, ‘작은 결혼식’처럼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결혼문화는 정착하기 힘들 것 같다. [사진 pixabay]

 
최근 들어 인터넷에는 “주례 없는 결혼식 하려는데 사회자 소개해주실 분?” 하는 질문과 “저희도 주례 없이 했는데 정말 좋았어요.” 하는 응원 댓글이 많다. 전문 사회자가 안정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밝고 편하게 진행해주어 인기 높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점잖고 품위 있는 주례가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신랑·신부 동시 입장, 전문 주례 등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주례 없는 결혼식이 가장 획기적인 것 같다. 어른들 입장에서는 평생 한 번뿐인 진지한 자리에는 품격 있는 주례사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주례가 없다는 게 장난처럼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주례 없는 결혼식에 참석해서 직접 보니 꽤 괜찮은 것 같다.
 
일단 결혼식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이제 결혼은 집안 간의 관계가 아닌, 남녀 개인 간의 일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혔기에 웃어른들은 하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주인공들을 향해 ‘앞으로 어떻게 살라’는 지침은 부자연스럽다.
 
분위기도 달라졌다. 결혼식은 엄숙한 독립기념행사가 아니라 사랑과 의지로 새로운 가정이 탄생하는 기쁜 이벤트다. 굳은 얼굴의 신랑, 눈물짓는 신부는 옛말이 되었고 환한 미소, 박수와 함성이 넘쳐나는 축제다. 근엄하고 교훈적인 주례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옷차림, 주례, 장소 등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커플이 늘어나고 있다. 배우 원빈-이나영 부부는 강원도 정선의 밀밭에서 주례도, 하객도 없이 소박한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된 바 있다. 더 이상 결혼은 집안 간의 관계가 아니다. 신랑, 신부 개인의 일이다. [연합뉴스]

옷차림, 주례, 장소 등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커플이 늘어나고 있다. 배우 원빈-이나영 부부는 강원도 정선의 밀밭에서 주례도, 하객도 없이 소박한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된 바 있다. 더 이상 결혼은 집안 간의 관계가 아니다. 신랑, 신부 개인의 일이다. [연합뉴스]

 
사실 예전의 주례사가 품격은 있었을지 몰라도 이면에 허세와 거품도 있었다. 존경할만한 인물보다 국회의원, 교수처럼 사회적 위세가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했고 그들은 신랑 신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제 할 말만 하고 가버렸다. 하물며 요즘처럼 경험이 지혜로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에 그들의 천편일률적인 메시지가 귀에 들어올까. 그러니 주례사 같은 답답한 순서는 빼고 마음에 와 닿는 프로그램을 구성해서 담백하게 예식을 치르려는 의도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런데 도대체 주례의 위상과 인기가 왜 그렇게 떨어진 걸까? 나는 그게 더 궁금하다. 신랑 신부가 주례사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한 문장씩 뜯어보면 전부 훌륭한 말이다. 그렇다면 전체적으로 형성하는 메시지가 그들의 취향, 나아가 그들이 지향하는 미래와 다르기 때문에 피하는 것 아닐까. 신랑 신부를 축복해주고 앞날에 비전과 영감(inspiration)을 줄 만한 내용이 없는 것이다.
 
도전보다는 현실적 안정을 선택해서 성공한 기성세대가 당부하는 말이니 젊은 세대의 현실이나 생각과는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 ‘아이 많이 낳아라’, ‘절약해서 집부터 사라’, 전부 좋은 말이지만 자기 시대의 이야기다.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런 주례사는 금언(金言)으로서의 생명을 잃었다.
 
서점에 가보면 오랜 진리를 현재 관점에서 다시 해석한 ‘새로 쓰는 ○○이야기’ 같은 제목의 책들이 많다. 그처럼 주례사도 시대에 맞게 다시 쓰거나 새로워져야 한다. 주례사는 기본적으로 ‘축사’여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를 북돋워 주고 치켜세워주는 말, 그들의 꿈을 응원하고 축복하는 말만 필요하다. 물론 대부분의 주례사에는 틀에 박힌 축하 인사가 들어있다. 그리고 신랑 신부의 출신학교, 직장, 집안 등을 언급하며 뜬금없이 그들의 ‘배경’을 예찬한다.
 
이어 ‘우리는 유경험자, 당신들은 무경험자, 결혼생활이 뭔지 알고 있나?’ 하는 전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예를 들면 “부부는 일심동체” 같은 메시지다.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도대체 사람이 자웅동체의 하등생물도 아닌데 어떻게 일심동체일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세대는 일심동체로 살았을까? 수십 년간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한마음, 한 몸으로 움직이는 것은 누군가의 일방적 희생이나 불이익이 따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1963년 나의 부모님 결혼식 사진. 그 당시에는 경험은 곧 지혜였고, 주례사 같은 어른들의 말씀은 진리에 한발 다가간 교훈이 될 수 있었다. 세상이 느리게 변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사진 박헌정]

1963년 나의 부모님 결혼식 사진. 그 당시에는 경험은 곧 지혜였고, 주례사 같은 어른들의 말씀은 진리에 한발 다가간 교훈이 될 수 있었다. 세상이 느리게 변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사진 박헌정]

 
나부터도 아내와 일심동체 되기 싫다. 만일 내가 주례를 선다면 ‘일심동체’ 대신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이야기하겠다. 두 사람은 분명히 같지 않은 존재이지만 조화를 이뤄 살아가야 하고 그 기반에는 존중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 부부가 평생 싸우지 않으려면 집 바깥에서 다른 사람에게 지키는 예의의 절반만 지키면 된다. 우리는 어머니, 배우자처럼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한테 가장 함부로 대하기 쉽지 않은가.
 
서로 무척 다르지만(不同) 그래도 존중하며 맞춰가는(和) 게 부부이고, 가정이다. 모든 개인이 제각기 다르지만 조화롭게 사는 ‘화이부동’이 사회와 나라가 유지되는 근간 아닌가. 일심동체는 군대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개성 강한 요즘 사람들을 하객들 앞에 세워두고 하나 되어 살라고 하면 좋아할까.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끼리 알아서 잘 살게요.”가 주례 없는 결혼식의 속뜻 아닐까 싶다.
 
앞으로 혼주가 될 나로서는 지루한 주례사보다 신랑 신부 부모님의 덕담이 더 크게 마음에 다가왔다. 이제 새로운 가정으로 분리되지만, 아빠 엄마는 너희들을 영원히 사랑하고, 너희들은 행복하게 잘 살 것이고, 그 행복이 곧 우리의 행복이라는 축복과 격려의 메시지가 주례사보다 훨씬 아름답지 않은가.
 
다음 세대를 우리 시대의 틀에 가두는 것은 부질없거나 어리석은 일이다.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아야 하듯 그들의 미래는 그들 것이니 주례사를 넣든 빼든 그들의 뜻을 존중하고 응원하는 게 아름다울 것 같다.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박헌정 박헌정 수필가 필진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25년간의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50세에 명퇴금 챙겨 조기 은퇴해서 책 읽고, 글 쓰고, 여행하는 건달이자 선비의 삶을 현실화했다. 은퇴 후 도시에 뿌리 박혀버린 중년의 반복적이고 무기력한 삶에 저항하기로 했다. 20대는 돈이 없어 못하고, 30-40대는 시간이 없어 못하고, 60대는 힘과 정보가 없어 못하던 일들, 꿈만 같지만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야 할 일들, 50대의 전성기인 그가 그 실험에 도전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인생 환승을 앞둔 선후배들과 공유한다.

Innovation Lab

Branded Content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