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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지 않는 아이도 낳으라고? 그건 일종의 폭력

중앙일보 2019.05.06 09:00
[더,오래] 조용수의 코드 클리어(19)
유남석 헌재소장 등 헌법재판관이 낙태죄 위헌 여부 선고를 위해 지난 4월 11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앉아있다. 이날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판결이 내려졌다. [중앙포토]

유남석 헌재소장 등 헌법재판관이 낙태죄 위헌 여부 선고를 위해 지난 4월 11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앉아있다. 이날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판결이 내려졌다. [중앙포토]

 
지난달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판결이 내려졌다. 참 오래 걸렸다. 헌재는 2012년 낙태죄 합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법관들은 시대를 따라잡기에는 지나치게 보수적이었다. 덕분에 역사의 속도를 따라잡는 데 60년이 걸렸다. 낙태는 실존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기록이 남지 않는다. 불법이기 때문이다. 밝히는 순간 처벌을 받는다. 분명히 주위에서 일어나는데, 공식적인 집계는 제로(0)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존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눈 가리고 아웅으로 마음에 평안을 얻었다. 생명을 소중히 하고 있다는 만족감이다. 대신 당사자들을 지옥으로 떠밀었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법 때문에 낙태는 음지로 들어가야 했다. 어떤 사회적 도움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되려 손가락질을 일삼았다. 임신은 본인이 선택한 업보니 당해도 싸다는 논리로. 아마도 이들은, 죽고 싶어 손목을 그은 사람이라면 굳이 살릴 필요도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래서 틀림없이 이렇게 요구할 것이다.
 
“본인이 죽든 살든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아무튼 살인은 저지르지 말라고.”
이게 지옥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응급실에서 일하면서 난감한 경험을 많이 했다. 교복을 입고 온 학생이 있었다. 이날 처음으로 임신이 진단되었는데, 아이가 나오기 직전이었다. 딸 대신 엄마가 까무러쳤다. 변기에 아이를 낳은 여자도 있었다. 끝까지 임신 여부를 몰랐고, 그저 복통으로만 알고 화장실을 갔다가 변고를 겪었다.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경우는 비일비재했고, 몸 상태보다 병원비를 더 걱정하는 경우도 흔했다. 아직 보호가 필요해 보이는 아이가, 아이를 낳아 키워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곤 했다.
 
대전에서 출발, 제천에 도착한 충북선 무궁화 1707호 열차 화장실 변기 내부에서 신생아가 숨져 있는 것을 청소하던 코레일 하청업체 관계자가 발견했다. 사진은 열차에서 숨진 채 발견된 신생아를 옮기는 경찰의 모습. [연합뉴스]

대전에서 출발, 제천에 도착한 충북선 무궁화 1707호 열차 화장실 변기 내부에서 신생아가 숨져 있는 것을 청소하던 코레일 하청업체 관계자가 발견했다. 사진은 열차에서 숨진 채 발견된 신생아를 옮기는 경찰의 모습. [연합뉴스]

 
임신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저마다 사연이 있었다. 차마 눈 뜨고 못 볼 사연들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얼마나 일어날까 싶겠지만, 낙태를 원하는 사람치고 무언가 사연 하나 없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과거의 사연만 있는 게 아니다. 미래의 걱정도 있었다. 앞으로 아이를 키우지 못할 사정 또한 많았다. 제 한 몸 간수도 쉽지 않은 이들이었다. 대부분 아이를 키울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원치 않는 임신은 사회 저층에서 훨씬 많이 일어나기에 상황은 더욱더 나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얘기한다.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그리고 딱 이런 식의 고지식한 주장 때문에, 말기 환자들은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박탈당해왔다. 바로 엊그제까지도. 정작 본인이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생명의 가치 같은 사치스러운 고민을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모두 똑같다.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무책임하게 도덕을 강요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훈계한다. 그게 굶어 죽으라는 얘기인 줄도 모르고. 쌀 한 톨 안 줄 거면서.
 
생각해보자. 여성은 임신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아이가 태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그건 바로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다. 무조건 아이를 세상에 낳으라고 주장하는 우리. 우리는 여성에게 원치 않는 임신을 지속하게 강요한다. 임신 과정의 고통도 강요한다. 여성이 절대 바라지 않는 삶을 강요한다. 말했다시피 낙태를 고민하는 계층은 사회 저층인 경우가 많다. 엄마도 아이도 앞으로 힘든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그들이 행복한 삶을 추구할 권리를 빼앗은 것도 우리다.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우리의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채운 대가로 그 여성들에게 무엇을 지불했는가? 어떤 보상도 해준 적 없다. 애를 대신 키워줄 것도 아니고, 평생 먹고살 만한 경제적 보상을 해줄 것도 아니다. 결국 우리는 책임질 게 하나도 없는 방관자에 불과한데, 그들에게 권리를 행사해 왔다. 이것은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에 불과하다.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하는 무소불위의 가치는 아니다.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인간답게 죽을 수 있도록 연명 중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이른바 '존엄사법'으로 불리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 개정안이 지난해 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오는 3월 28일부터 시행됐다. [연합뉴스]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하는 무소불위의 가치는 아니다.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인간답게 죽을 수 있도록 연명 중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이른바 '존엄사법'으로 불리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 개정안이 지난해 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오는 3월 28일부터 시행됐다. [연합뉴스]

 
까놓고 말해, 생명이라는 게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하는 무소불위의 가치도 아니다. 소생 가능성 없는 환자가 인간답게 죽고 싶어 할 때, 우리는 연명 중지를 결정한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판단할 때, 우리는 아름다운 죽음을 선택하곤 한다. 그리고 그 결정을 지지해준다.
 
낙태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모든 낙태가 불법인 것도 아니었다. 심한 장애가 있거나 강간으로 인한 임신을 하는 등, 적합한 사유가 있는 경우는 이전에도 합법적인 낙태가 가능했다. “생명이니까 안돼”라는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일축하는 건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들만 가능한 주장이다.
 
낙태는 살인이 아니다. 우리 곁의 현실이고 실존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낙태의 기준을 정하는데 ‘언제부터 생명이라 볼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논쟁에만 너무 매몰되지 않기를 바란다. 선비들이 지적 유희를 즐기는 사이, 당장 오늘도 피 흘리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중요하다고? 당장 오늘을 인간답게 살고 싶은 한 여성의 삶도 엄연한 하나의 생명이다. 이들의 삶을 최대한 보호할 수 있는 상태에서 현실적인 기준이 마련되길 바란다.
 
조용수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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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수 조용수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필진

[조용수의 코드 클리어] 의사는 누구보다 많은 죽음을 지켜본다. 삶과 죽음이 소용돌이치는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는 특히 그렇다. 10년 가까이, 셀 수 없이 많은 환자의 생과 사의 현장을 함께 했다. 각양각색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며, 이제는 죽음이 삶이 완성이란 말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환자를 통해 세상을 보고, 글을 통해 생의 의미를 함께 고민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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