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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에서 500년, 아이같이 맑은 미소

중앙일보 2019.05.06 00:02 종합 19면 지면보기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전. 영월 창령사는 고려 말~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나한상도 그 시기에 만들어져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전. 영월 창령사는 고려 말~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나한상도 그 시기에 만들어져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나한의 얼굴에서배어 나오는 맑고 은은한 미소가 보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나한의 얼굴에서배어 나오는 맑고 은은한 미소가 보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지난해 춘천국립박물관에서 소개됐을 때 관람객들 반응이 좀 특이했죠. 전시장 안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계속 빙글빙글 돌며 작품을 보고 또 보는 분들이 유독 많았거든요. 그리곤 많은 분이 나중에 몇 번씩 다시 오셨어요.”
 
지난해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열린 한 특별전 얘기다. 당시 국립춘천박물관에서 근무하고 올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온 미술부 강삼혜 학예연구사는 “한 스님은 이 전시를 네다섯 번이나 보셨고, 고고미술사를 전공한 한 교수님은 ‘유럽의 수많은 미술관을 다녔지만 이만큼 감동을 주는 작품은 없었다’며 계속 찾아오셨다”고 전했다.
 
지난해 춘천에서 3만여 관객을 매료시킨 전시는 강원 영월군 창령사 터에서 나온 나한들로 꾸민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전이었다. 지난해 8월 춘천에서 개막해 올해 3월까지 연장 전시된 이 전시는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이 뽑은 ‘2018년의 전시’로 선정됐다.
 
창령사 터 나한들이 처음으로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지난해 전문가들로부터 압도적인 평가를 받고 서울 순회전의 특전을 받은 것. 올해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전시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전시의 감동이 크다.
 
영월 창령사 터에서 출토된 나한들은 가사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영월 창령사 터에서 출토된 나한들은 가사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영월 창령사 터에서 출토된 나한상. 많이 훼손된 상태로 땅 속에 묻혀 있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영월 창령사 터에서 출토된 나한상. 많이 훼손된 상태로 땅 속에 묻혀 있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토록 친근한 얼굴
벽을 더듬어서 들어갈 정도로 어두운 전시장 입구를 지나 처음에 만나는 것은 각기 독립적인 좌대에 앉은 32구의 돌 조각상이다. 그런데 이 나한상들은 우리가 그동안 사찰에서 흔히 보아오던 불교 조각상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야심 만만한 어느 현대 조각가의 작품 같다. 세월의 흔적에 돌은 닳고 이지러져 있지만, 거친 표면을 타고 흐르는 부드러운 곡선이 빚은 나한들의 친근한 표정이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진경 서울과기대 기초교육학부 교수가 “일상의 누추함을 어루만져 주는 얼굴”이라고 부른 것들이다.
 
이번에 서울을 찾은 나한들은 창령사 터에서 발견된 나한상 중 88점이다. 1부에서 32구를 보여주고, 2부에선 스피커 700여 개를 탑처럼 쌓아 올려 그 사이사이에 나한상 29구를 배치해 현대미술과 만난 나한상을 보여준다. 김승영 설치작가가 도시 빌딩 숲에서 성찰하는 나한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박경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2부 전시는 국립박물관과 설치작가 김승영이 머리를 맞대고 과거의 문화유산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협업의 결과물"이라며 "번잡한 현대 도시의 삶에서도 지속되고 있는 '자아 성찰'의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김승영 작가가 국립중앙박물관과 협업해 완성한 설치작품 '도시 속의 나한'. 700개의 스피커를 탑처럼 쌓아올려 그 사이에 나한상 29구를 배치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김승영 작가가 국립중앙박물관과 협업해 완성한 설치작품 '도시 속의 나한'. 700개의 스피커를 탑처럼 쌓아올려 그 사이에 나한상 29구를 배치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창령사 터에서 출토된 나한상. 관람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전시작 중 하나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창령사 터에서 출토된 나한상. 관람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전시작 중 하나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500년의 세월을 넘어
"마을에 있거나 들판에 있거나/ 평지에 있거나 높은 언덕에 있거나/ 아라한이 지나는 곳이라면 어느 누가 그의 은혜 입지 않으리." (『법구경』10장 나한품 중에서) 
 
불교에서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인간을 말한다. 나한은 신통력을 지니고 중생이 복을 누리도록 돕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나한 신앙은 중국에서 7세기에 본격화돼 우리나라에 전해졌는데, 기록에 따르면 고려 왕실에서는 나한재를 열어 기우와 국왕의 장수, 외적의 퇴치 등을 기원했다고 한다.
 
창령사 터 나한상은 2001년 5월 영월에서 농사를 짓던 김병호씨가 땅을 일구다가 처음 발견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강원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벌여 형태가 완전한 상 64점을 포함해 머리 118점, 신체 일부 135점 등 총 317점을 찾아냈다. 그 과정에서 ‘창령사’(蒼嶺寺)라는 글자를 새긴 기와가 나왔고, 중국 송나라의 동전 숭녕중보(崇寧重寶)와 고려청자 등도 함께 출토됐다. 그곳이 바로 고려 시대(12세기 무렵)에 지어진 창령사가 있던 자리임을 알려주는 단서다. 한편 나한상은 고려 말~조선 초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선주 국립중앙박물관 연구기획부장은 "창령사 절터는 발굴조사 이전까지는 사찰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아 창원리 절터 혹은 무덤 절터로 불려온 곳"이라며 "발굴된 일대가 나한상을 봉안한 나한전 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경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출토 유물과『신증동국여지승람』(1481년, 1530년)과 『동여비고』(1682년 경)등의 기록으로 추정하면 창령사는 12세기에 지어져 조선 중기 이후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 학예연구사는 이어 “창령사 터 나한상은 파손이 심한 상태였고, 머리 부분이 신체에서 잘려나간 경우도 많았다”며 "학계 일부에서는 고의로 상을 훼손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창령사 터 오백나한' 전 1부 전시장.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의 ‘창령사 터 오백나한' 전 1부 전시장.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나한은 그저 웃지요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을 사로잡는 것은 각기 다른 나한의 얼굴들이다. 산과 바위, 동굴에서 수행하는 구도자들의 모습을 형상화했는데, 그 얼굴이 천진무구한 아기의 표정과 삶을 달관한 노인의 표정을 넘나든다. 대개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드물게 서글프고 고통스러운 표정도 눈에 띈다. 
 
조은정 미술사학자이자 미술평론가는 “창령사 나한상이 주는 감동은 다양한 표정에 있다”며 “나한상은 인간의 승화한 성품을 나타내는 도구이자 친근성을 기반으로 한 대중조각이었다"고 말했다. 조 평론가는 이어 "나한은 슬픈 표정 대신 웃음이 가득한 얼굴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르렀고 중생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나한상은 희망의 공간에 위치한 존재”라고 설명했다. 
 
이진경 교수는 “창령사 터 나한상은 부드러운 선이 특징”이라며 “따뜻하고  편안한 표정을 통해 부처란 지고한 인격체의 형상이 아니라 길거리와 장터에서 살아가는 중생들 자신임을 말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그는 이어 "깨달음이란 그 누추한 일상을 평안한 미소로 채워 넣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고 전했다. 
 
한편 창령사 터 나한은 머리 위까지 가사를 뒤집어쓰거나 두건을 쓴 것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가사를 덮어쓴 나한상의 모습은 북위 시대숭산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었던 달마의 모습과 닮아 있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나한의 표정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나한의 표정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김이순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는 “조각이 단순해 보이지만, 섬세한 표정 묘사에서 장인의 감성을 느낄 수 있다”며 “나한상은 종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순도 높은 감동을 전하는 예술작품으로 볼 만하다”고 말했다. 전시는 6월 13일까지.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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