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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간만에 좋은 흐름, 이제 ‘시즌 2’ 대비해야

중앙선데이 2019.05.04 00:20 634호 31면 지면보기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기적이라고들 한다. 한일 수산물 분쟁에서 1심을 뒤집고 항소심에서 승소했다. 2015년 5월 시작되었으니 꼬박 4년 걸렸다. 어려운 분쟁이었다. 난관을 극복하고 여기에 이른 건 담당 공무원들의 헌신과 노력 때문이다. 칭찬받아 마땅하다. 일본 제소 후 그 다음 달, 분쟁의 첫걸음을 뗀 제네바 양자협의에 참석했던 필자에게도 당시 기억이 새롭다.
 

새로운 분쟁절차 우후죽순
사활 건 국가 간 다툼 급증에도
우리 인프라 턱없이 부족
무역분쟁 전문인력 양성 시급해
수산물 분쟁 흐름 살려
국가적 차원에서 나서야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와 앞을 바라볼 때다. 무엇보다 이 분위기를 살려야 한다. 무역분쟁이 급증함에도 정부 내 우리 전문 인력은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무관심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이제 국가적 차원에서 양성에 나설 때다.
 
지금 상황이 어떤가. 여태 세계무역기구(WTO)에선 583건의 분쟁이 있었다. 계속 늘어난다. 이 중 38건이 우리 사건이다. 제소가 20번, 제소당한 게 18번. 164개 회원국 중 10번 째 빈도다. 수산물 빼고 지금도 6건의 분쟁이 이런 저런 절차에 계류 중이다. 10명 안팎의 제한된 인력으로 이 분쟁들을 수년에 걸쳐 관리하고 대응하는 것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노력이다. 국익이 걸렸으니 한 건 한 건 전력투구해야 하는 까닭이다. 인력과 자원이 턱없이 모자라니 제소해야 할 때 못하는 경우도 많다.
 
‘3자 참여’는 그림을 더 잘 보여준다. 그간 우리나라는 무려 124건의 WTO 분쟁에 제3자로 참여하였다. 표나지 않지만 3자 참여는 중요하다. 어떤 의견을 개진하는지에 따라 협정 해석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 요컨대 위 둘을 합하면 그간 162건의 무역분쟁에 누군가가 나서서 우리 입장을 펼쳤다는 이야기다. 수 명의 담당자의 부담을 가늠할 수 있다.
 
이런 고민이 그대로인 가운데 이제 무역분쟁절차 ‘시즌 2’의 막이 올라가고 있다. 새로운 내용과 전개로 가득 차 있다. 그 면면을 보자.  
 
먼저 새로운 배우들의 등장이다. 지금까지는 WTO 단독주연이었다. 그런데 이제 자유무역협정(FTA) 분쟁도 기지개를 켠다. 공동주연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체결한 FTA만 모두 15건. 각각 별도의 분쟁해결 절차가 있다. 그러니 WTO 외에도 이미 15개의 별도 절차가 작동 중이다. 서로 비슷하기도, 다르기도 하다. WTO 절차가 구획정리 잘 된 신도시라면 FTA 절차는 난개발에 가깝다. 여기 드는 노력과 발품은 결이 다르다. 특히 지금 가입 모색 중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같은 다자간 FTA는 한술 더 뜬다. 유리그릇처럼 다루어야 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몇몇 FTA는 여기 더해 각 영역별 분쟁해결 절차를 마련하고 있기도 하다. 올 들어 유럽연합(EU)이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를 꺼내고, 미국이 우리 공정거래위원회 조사절차 관련해 양자협의를 요청한 게 이 영역별 절차다. FTA 분쟁절차가 언급된 건 우리에겐 처음이다. 바뀌는 풍향을 읽을 수 있다. 이들을 전부 다루려면 산술적으로도 지금보다 몇 배의 인력이 필요하다.
 
둘째, 줄거리는 더 꼬이고 각본은 반전의 연속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무역분쟁이 물 위 우아한 수영이라면 물밑에선 치열한 발길질이 있다. 바로 반덤핑, 상계관세 조사와 ‘국가안보’ 추가관세 등이다. 지금 발길질은 더 거세지고 신음은 터져 나온다. 누군가는 밤낮으로 담당해야 할 일들이다.
 
시즌 2의 셋째 모습. 더 ‘자극적’인 내용의 등장이다. 인공지능과 4차산업 시대는 기술개발이 처음이자 끝이다. 핵심 산업의 기술개발 문제가 걸리면 국가들은 집요하다. 세계 항공기 시장을 양분하는 보잉·에어버스간 기술 경쟁으로 미국과 EU는 2004년부터 15년째 5건의 WTO 분쟁을 주고 받는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 4월 8일 미국이 EU에 대해 110억 달러 관세부과를 언급한 건 바로 이 건이다. EU도 열흘 뒤 200억 달러 보복 계획으로 응수했다. 비행기라면 이들은 끝까지 갈 태세다.
 
마이너 리그인 100석 이하 항공기 시장 강자는 다른 두 나라, 캐나다와 브라질이다. 여기도 사정은 마찬가지. 지금까지 5번에 걸쳐 제소, 맞제소로 맞섰다. 항공기 산업 기술개발과 경쟁엔 물불 안 가리는 모양새다.  
 
그렇다면 ‘기술개발’이 화두인 새로운 시대에 우리 미래 먹거리와 관련된 분쟁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대략 감이 온다. 다시, 누가 이를 담당할 것인가? 전문인력 양성이 시급하다.
 
새롭게 시작되는 시즌 2는 지금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몇몇의 헌신과 희생에만 기대기엔 변화의 폭이 너무 크다. 지금처럼 가다간 정부 내 분쟁담당은 ‘극한직업’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일당백 정신도 중요하나 인프라가 쫓아가야 한다.  
 
그래서 이번 동력을 살려야 한다. 물이 들어오니 열심히 노를 젓자. 다른 데도 그렇지만 여기도 사람 키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더 늦기 전에 움직이자. 올바른 방향성만 주어지면, 제도만 따라가면, 이 분야에 천착할 젊은이들은 차고 넘친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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